골로새서 첫 부분의 놀라운 계시 (골 1:1-14)

다른 서신들과는 다르게 이번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자신에 대해 1절에 간단히 말한다. 2절의 '골로새'는 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단어인데 지명을 말하지만 다른 지명과는 다르게 복수로 되어 있다. 그래서 광활한 땅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찾아보니 매우 작은 마을이다.  이 지명의 어원인 colosse 는 '거대함'을 뜻하는데, 거대함의 복수가 바로 이 도시의 이름이다.  말 자체는 복수형이지만 구조상으로는 단수로 취급되는 흥미로운 지명인데, '갈라디아'는 매우 넓은 지역을 아우르기 때문에 '교회들'이라고 교회도 복수형으로 썼지만, 이 골로새라는 마을은 상대적으로 매우 작았고, 아마도 교회 역시 아직은 자리잡지 못했던 곳일 수 있다.  그래서 '교회'라는 말 대신에 '성도들' 그리고 '신실한 형제들'이 이 서신의 수신자가 된다.

3절은 원어로 '항상 여러분을 위해 기도해 지고 있습니다'로 되어 있는데 개역의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는 바울이 그들을 위해 단지 가끔만 기도하는 것 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원어는 바울과 디모데가 골로새 성도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고 있다고 하며, 수동태로서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의 힘 보다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도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감사하며' 기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 아가페'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믿음과 모든 성도들 안으로 역사하고 있었기 때문인데 (4절), 그 아가페는 또한 소망을 갖게 했고, 그 소망은 하늘들 안에 그들을 위해 예비되어 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이러한 진리의 말씀을 이미 들었기 때문이었다 (5절). 그들이 이미 들었기 때문에 소망이 하늘들 안에서 쌓이고 있는, 즉 소망이 하늘에 예비되고 있음을 그들은 또한 알고 있었다.

6절은 열매를 맺는 주체가 '여러분'이 아니라 바로 '그 아가페'임을 말씀하는데, 아가페이신 하나님께서는 그 자체로 또한 동일한 '그 아가페'를 열매 맺으신다. '여러분이 진리 안에서 그 하나님의 그 은혜를 듣고 또한 깨달은 날 부터 여러분 안에서 처럼 열매 맺고 있'다 라고 말하는데 그 열매는 '여러분 안' 즉 '성도들'로서 아가페이신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 혹은 그의 자녀들 역시 그 열매로서 '그 아가페'되기 원하신다. 요 13:35은 원어로 '서로들 안에 너희가 아가페를 소유하고 있다면 이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너희가 나에 대해 제자들임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그래서 우리는 그 아가페를 '행하'기에 앞서 그 아가페를 '소유'해야 하는 것이다.

7절에는 '우리의 함께 된 종, 경애하는 에바브라'가 '그리스도의 집사'임을 말하는데, 단지 '여러분의'가 아니라 '여러분 위의'로 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하나이지만 그들이 에바브라에게 배웠기 때문에 에바브라는 스승이며 그들 '위'에 있었다. 집사는 보통 '밑에서 섬기는' 사람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신실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사람은 '위'에 있어도 갑질하지 않고 섬김으로 가르친다.

8절은 '그는 또한 영 안에서 아가페를 여러분에 대해 우리에게 확언한 (사람입니다)'라고 하는데, 원어에서는 '그'가 에바브라인지 그리스도인지 확실하지 않아 보인다. 문맥상 에바브라인 것 같고 모두 주격이라서 에바브라를 의미하는 것 같기는 하지만, 바울이 이렇게 분명하게 쓰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었을까? 아마도 '그리스도의 신실한 집사'는 '하나님의 천사'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그 동일한 권위를 소유하고 있다는 말로도 들린다. 참된 선생의 가르침은 그 보내신 그리스도와 함께 할 때 그 동일한 권위가 나온다.

9절은 '이를 통해 우리 또한 (우리가) 들었던 날부터 여러분 위에 기도하게 됨과 간구함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다시 한번 말한다. 바울은 9-11절에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그들이 모든 영적 지혜와 통찰 안에 하나님 뜻을 깨달음으로 충만해지고, 주께 합당히 걸어 모든 기쁨 안에서 모든 선한 일로 열매를 맺으며 그 깨달음 안으로 자라고 그의 영광의 힘을 통해 모든 능력 안에서 능하게 되어 기쁨으로 모든 인내와 오랜 고난을 (견딜 수 있도록) 기도했다. 이것은 다시 말해 '영적'인데, 그 어느 것도 물질에 속한 기도 제목이 없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애매한 기도제목이지만, 결론적으로 그 열매는 '모든 인내와 오랜 고난을 견딜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단지 견뎌 내는 것 만이 아니라 5절 처럼 그 예비 되어지는 소망을 통해서 가능한데, 12절의 감사함이 넘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영광의 능력으로 그 유업의 몫에 우리를 충분하게 하셨고,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출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의 왕국으로 옮기셨기 때문이며 (14절) 또한 우리의 죄들이 탕감 받았는데, 이것은 '그 아들의 피를 통해 놓임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음'을 말씀한다.

여기에 두 가지 볼 것이 있는데, 하나는 '어둠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출하셨다'의 '구출하다'가 능동태가 아니라 중간/수동 이태 동사로 되어 있다. 하나님 아버지는 (12절) 절대 지존하신 분이신데 능동태가 아니라 왜 중간/수동 이태 동사로 되어 있을까? 사실 이 ῥύομαι 라는 말 자체가 중간태 형으로 존재하는 특이한 단어이지만, 생각해 보면 하나님 아버지의 구원 사역은 그 분이 계획하셨어도 그 '구속' 자체는 아들 하나님이 이루셨고 또한 시간 안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현재 역사하셔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아들'과 '그 피'를 말씀하는 것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14절을 개역은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라고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속량을 소유하고 있다'로 되어 있다. 주님의 속량하심은 단 한번에 끝난 것이지만, 현재에서 우리가 그 속량을 누리는 것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기에 언제든 우리가 요구하며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공로를 인정하며 감사하는 것이 된다.

주님, 골로새서를 통해 귀한 계시의 말씀이 내 안에 새겨지기 원합니다. 내가 소유한 것이 무엇인지 그 가치와 부요함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 주의 진리의 말씀을 받고 또 전하는 집사로서 신실하게 하소서. 주의 그 권위 또한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