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생활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참된 신앙의 자태 (골 2:16-23)

골로새서 2장에는 신약에 단 한번 나오는 단어들이 꽤 있다. 이러한 단어들은 한번만 나오기에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생활에서 분명 맞닥뜨리는 일들이지만 신경쓰지 않으면 놓치게 되는  것들일 수 있는데, 그래서 사실은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 된다.

앞서 그리스도의 공로로 율법의 모든 요구가 끝났을 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도 침례를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일어났음을 말한 후에, 16절은 '그러므로' 라고 연결하며 율법에서 정하고 명했던 규율들 즉 음식이나 음료나 절기에 관한 것이나 새달이나 안식(일)들에 관한 사항들이 이제 모두 무의미하게 되었음을 말한다. 이것은 종교적으로 보면 기독교는 이제 유대교와는 분리된 것임을 분명히 하는데, 유대교의 바탕인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지만 17절은 '이것들은 다가오고 있는 것들의 그림자이나 그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씀한다. 과거 모든 규율들은 다가오고 있는 것들 (현재진행형 복수)의 그림자인데, 실재가 아니라 허상이다. 하지만 '몸' 즉 그 그림자의 실재 혹은 실체는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말한다.

18절부터는 종교생활을 설명하는데, 사람들 특히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믿고 있는 것의 실상을 보지 못했음에도 기꺼이 자신들을 겸손한 모양으로 보이게 하려 하고 특히 천사들을 숭배하는 등 종교적인 의식들을 행한다. 하지만 그러한 종교 생활은 모두 헛된 것이며 실상은 그들의 생각이 마치 누룩 처럼 부풀려지고 있는 것이다.

19절은 원어로 '그리고 그 머리를 붙잡고 있지 않습니다. 그로부터 온몸이 ..' 라고 되어 있는데, '그 머리'에 대해 '그 it auto'라고 하지 않고 '그 whom ou'라고 한다. 즉 그 '머리'는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 머리로 부터 각 마디들과 힘줄들을 통해 그 몸은 성장하는데, 그 성장은 '하나님의 성장으로 (목적격)' 즉 하나님에게 까지 자라고 있다고 밝힌다. 교회는 분명히 주님의 몸이지만, 아직은 온전하게 자라지 않은, 즉 성장이 필요한 몸인데, 그 몸의 한계 혹은 목적은 '하나님 까지' 이다.

흥미로운 것은 20-22절 내용은 분명 유대교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세상의 초보들'이라고 하는데, 유대교의 많은 것들이 헛되게 될 종교적인 것은 물론 '세상'에 속한 것들임을 밝힌다. 그리스도 외의 것들은 그 어느것도 거룩하거나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것들이 아니라 단지 세상에 속한 것이며 결국은 썩어질 것이다.

23절에는 신약에 단 한번 등장하는 단어가 셋이나 나오는데, 먼저 '자의적 숭배'로 번역된 ἐθελοθρησκία라는 말로 '의지'와 '종교의식 혹은 숭배'의 합성어이다. 기독교는 물론이지만 여러 종교들의 많은 의식들은 각자 매력적인 면들이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기에 속기 쉬운데, 특히 '고행'은 아마도 종교 의식 중에 최고봉일 수도 있다. '몸을 괴롭게 하다'에서 '괴롭게 하다'의 원어는 ἀφειδία 로 '아끼지 않다' 즉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것 즉 고행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을 통해 어떤 종교적 성취나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데, 바울은 이 모든 것들이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고 한다. 이 '육체를 따르다'에서 '따르다'의 원어는 πλησμονή로 무언가를 채워 만족을 느끼는 것을 의미하는데, 즉 육신의 방탕함 혹은 멋대로 함 혹은 방종이나 그에 따른 만족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은 종교 생활이라는 것이 '육신을 멀리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동시에 실상은 그 육신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

우리는 종교인들이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노력이나 애씀은 필요없다. 우리의 육신은 그 정욕이나 방종의 욕구를 항상 발하지만,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해 종교 생활이나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 즉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고 바로 이것이 참된 신앙의 자태이다.

주님, 감사합니다. 종교 생활을 끝내기 원합니다. 신앙 생활이 나의 일상이 되기 원합니다. 머리이신 주님을 주목합니다. 주님의 몸이 하나님에게 까지 성장하기 위해 마디들과 힘줄들의 연결이 필요함을 봅니다. 주님의 공동체들을 오늘도 세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