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우리에게 하시듯 우리 또한 주께 하듯 해야 함 (골 3:18-4:1)

생명의 삶은 오늘 말씀 범위가 4장 1절을 포함하게 했는데 원어에도 앞 부분과 연결되게 기록되었다. 각 부류의 사람들에게 명하는 내용인데, 눈여겨 볼 것은 원어에 '~이여'의 여격이 아니라 '~는'의 주격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아내들은 ~ 하라' 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불러서 직접적으로 명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사람들은 이리 저리 할 것이다 라는 말로 그들에게 주권과 선택권을 준다.

18절은 '그 여자들은 (아내들은) 그의 남자들에게 복종하라. 주 안에서 합당한 (것) 처럼' 이라고 되어 있는데, 복종과 순종의 차이는 무엇일까? 여기 '복종'은 ὑποτάσσω로 신약에 49번 나오며 자신을 남들 '밑에 두는' 것을 의미한다. 즉 자신을 낮추는 것인데, 골로새서에는 여기 단 한번 나왔고, 같은 내용을 언급한 엡 5:22에도 쓰였다. 흥미로운 것은 엡 5:21에는 '서로 복종하라' 그리고 24절에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것 처럼'에도 쓰였다. 이것은 분명 자신을 낮추지만 동시에 '하나됨'을 의미한다. '하나됨'이라는 의미가 '같다'라는 말인 동시에 자신을 낮추는 것도 된다는 것이다. 부부는 한 몸이지만 이 '낮추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내들이 그들의 남자 즉 남편에게 한다.

19절은 '그 남자들은 (남편들은) 그 여자들을 아가페하고 있으라 그리고 그들을 향해 (맛이) 쓰게 되어지지 말라'고 하는데, 아내들에게 복종하라고는 먼저 말하지만 사실 남편들에게는 그 보다 더욱 쉽지 않은, '아가페'를 명하고 있다. 이 '아가페' 사랑은 천연적인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전인격적 변화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아가페'와 '(맛이) 쓰게 되지 말라 (수동태)'를 함께 놓았다. 보통 '사랑'이라고 하면 달콤하고 따뜻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만일 아가페가 그랬다면 '쓴' 문제를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아가페'는 어떤 핑크빛 사랑이나 달콤함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수고'이며 '고생'이고 '희생'이다. 따라서 남편들에게 아내들을 향해 어떤 인간적인 사랑을 베푸라고 명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베푸신 그 동일한 아가페를 행하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 아가페를 제대로 실행하면 어쩌면 가끔은 냉랭하고 (맛이) 쓰게 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조절이 필요한데, 아가페는 감정적인 사랑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어주는 수고와 희생이다.

20절은 '그 자녀들은 모든 (것을) 따라 그 부모들에게 순종하고 있으라. 이것이 주를 기쁘시게 함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데, 다시 '순종'과 '복종'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18절은 '복종'으로 되었지만 여기는 '순종'이다. 개역개정에는 '순종'이라는 말이 65번 나오는데, 영어의 obey에 해당하며 원어로는 ὑπακούω로 '밑에서 듣다'를 의미하고 23번만 등장한다. 이 말은 계속해서 '주종' 관계나 만물이 주님께 순종할 때, 그리고 이렇게 부모와 자녀들 간에 사용되었다. 이것은 '듣는' 문제인데, 듣고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부부간의 관계는 아내가 기꺼이 자신을 남편 아래 두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순종'은 '듣고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부부 간에는 이 '순종'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고 따라서 한번도 쓰이지 않았다 (물론 아내가 남편 말을 듣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자녀들로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 즉 부모의 말을 듣는 것은 자신들의 부모는 물론이고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부모들이 아무거나 막무가내로 자녀들에게 시킬 수는 없다. 공부를 하라고 해서 순종하고 곧바로 앉아 공부할 수 있는 자녀들이 얼마나 될까? 흥미로운 것은 교육은 대부분 집에 있는 어머니가 아이들에게 하게 되지만 (물론 현재는 맞벌이 부부가 많아도), 정작 권위를 가지고 그들에게 순종하도록 하는 이들은 '아버지들'이다. 그래서 21절은 '그 아버지들은 그 자녀들을 분노하게 하지 말라 그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이라고 한다. 동사가 모두 현재진행형인데, 명령할 때 계속해서 같은 말을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그러한 것이 '잔소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감정이 섞이지 말아야 하고 그 하는 말투가 아이들이라도 그들을 존중하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 아이들이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마치 노예를 부리듯 한다면 아이들은 그들의 인격에 상처를 받고 낙심할 수 있다.

22절 부터는 주종관계를 언급하는데, 사람은 평등하지만 현재까지도 사람들 간에 이 '주종관계'는 계속된다. 직장에도 사회에도 이러한 주종관계는 지속되는데, 그렇다고 바울이 기본적인 인권을 아예 무시하는 근대적 노예 제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종들에게도 명하지만 4장 1절은 상전들에게도 또한 명하는 것이다. 우선 종들에게는 '그 종들은 (혹은 노예들은)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들에게 모든 (것들)에 순종하라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이들같이 눈으로만 종된 이들 안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 단일한 마음 안에서 (하라)'고 한다. '육체를 따라 너희의 주들에게'라고 한 것은 오직 한 '주'가 계시지만 육신적인 면에서 주인들이 존재함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육신의 아버지가 계시지만 실은 하늘의 참 '아버지'가 계시는 것과 같다. 종들이 이러한 '육신을 따른 주인'을 섬기는 것에 대해, 쉽게 말해서 있을 때만 잘하지 말고 없을 때도 잘하라는 것인데, 그 근본 이유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단일한 마음이 나오기 때문이다.

종들에 대한 명은 비교적 긴데, 25절까지 이어진다. 이러한 언급은 그 원리가 단지 '육신에 따른' 주종 관계를 넘어 영적으로 하나님과 그의 종들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23절은 '그리고 무엇이든 혼 밖으로 하고 있는 모든 것을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 (하듯 하지) 말라'고 하는데, 22절에서 '단일한 마음'에 대해 얘기했다면 여기에는 '혼 밖' 즉 우리의 인격 자체 혹은 자신들이 하는 모든 것에 대해 주님을 대하듯 하라는 것이다.

24절은 그 이유에 대해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로 부터 받게 될 것을 여러분은 알았으니 주 그리스도께 (여러분은) 종노릇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고 설명한다. 종들이 그 육신의 상전들을 섬기는 것이 실은 '주 그리스도께 종노릇 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주께 하듯' 하기 때문이다.

25절은 '그러나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가 행한 불의를 (에 대해) 돌려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차별이 있지 않습니다'라고 한다. 종이 하는 불의는 그 종 됨에서 벗어나 자신이 주인되는 것이다. 이러한 불의에 대해서는 응당 그 한대로 '미래에' 돌려 받게 될 것인데, 이에 대한 차별은 '지금' 없다고 한다. 상응하는 보응은 미래에 있을 것이지만 현재는 종노릇과 그 기준 및 앞의 보응에 대해서 차별이 없다.

4장 1절은 마지막으로 '육신에 따른 주인들'에 대한 명령인데, '주(인)들은 정의와 공정함을 (으로) 종들에게 주어라 여러분들도 하늘들 안에 주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았다' 라고 한다. 그런데 여기 '주어라'는 παρέχω로 '옆에 함께'를 뜻하는 παρά와 '소유하다'를 의미하는 ἔχω의 합성어이다. 즉 이 말은 주인이라고 종들에게 강압적으로 일을 시키며 무조건 이익이나 결과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함께 소유함'으로 일하게 하는 것인데, 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충분히 제공하면서 일을 시킨다는 의미다. 이것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일하게 하시는 것과 동일한 원리로 지난 1장 29절에 바울은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증거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일을 시키시는 것이 세상의 그것과 얼마나 다른가! 우리는 주님의 어떠하심을 이루기 위해 우리의 힘이나 노력이나 지혜만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베푸신 것 만큼 하는 것이다.  물론 주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것은 무한한 그의 은혜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하늘들 안에 주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라고 바울은 상기시킨다.

주님, 교회 일을, 주님의 일을 마치 세상 일 처럼 배우지 않기 원합니다. 무언가 결과물에 집착해서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기 원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섬길 수 있는 그 양과 질은 주님께서 우리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만큼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안에 더 깊이 더 강하게 역사하소서. 우리가 하늘에 계신 주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주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