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시간을 되사옴, 사귐, 말 (골 4:2-6)

원어로 2절은 '그 기도에 (를 향해) 지속하고 있으라 그 안에 감사함 안에 주목함으로'로 되어 있다. 기도를 항상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도에 '대해' 우리의 태도를 지속하는 것 역시 중요한데, 원어로 '기도하다'는 항상 중간/수동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주목하다 (깨어있다)'는 능동태인데 주목함으로 혹은 깨어 있음으로 기도에 대해 지속할 수 있다.

3절은 원어를 직역하면 '또한 동시에 우리에 대해 기도되기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신비를 말하는 말씀의 문을 열어 주시도록, 나 또한 이를 통해 묶였습니다' 정도가 될 것 같은데, '말씀의 문'은 아마도 '전도'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욱 알고 누리는 것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사도들이 그 신비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고 따라서 그 신비를 전할 수 있는 문이 열리기를 구했다. 전도라는 것이 요즘 마케팅 처럼 인간의 지식과 계획 혹은 전략을 가지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도는 '종교'를 확장하는 소위 '포교'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 즉 생명을 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케팅'이 아닌 사도들의 헌신과 성도들의 기도의 동역,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심이 필요하다.

4절은 또 바울 자신이 그 신비를 밝히 드러낼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했는데, 그가 말하는 것은 그의 의무였다. 그는 반드시 전도해야 할 사명이 있었는데 독단적으로 할 수도 있었지만 '그 신비를 밝히 드러낼 수 있도록' 기도를 부탁했다. 우리가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을 위해 기도할 제목인데, 그들이 주님의 그 신비를 말할 때 성령께서 먼저 그들 안에서 밝히 드러나지심으로 그들이 깨닫고 또한 그 밝혀진 그리스도의 신비를 다른 이들에게도 밝히 드러낼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5절은 '밖에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지혜 안에 걸으시오 시간을 되사들이며'라고 되어 있는데, 한글 번역본에는 '구속' 혹은 '속량' 등으로 번역된 말이 많이 나오고 영어 redemption과 redeem을 같은 말로 이해해서 그렇게 번역했겠지만, 원어에서는 이 둘이 다르다. 예를 들어 롬 3:24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 그리고 롬 8:23 '우리 몸의 속량'에 해당하는 단어는 ἀπολύτρωσις로 신약에서 10번 쓰였고, ἀπο (부터, 의, 밖으로 등등)와 λύτρον(인질)의 합성어이다. 즉 여기에는 '인질'이라는 대가를 주고 구해 내는 것을 의미하는 반면, 5절 '세월을 아끼라'에서 '아끼다'로 번역된 영어 redeem의 원어는 ἐξαγοράζω로 신약에 단 4번만 나온다. ἐκ (의, 부터, 밖으로 등)과 αγοράζω (사다, 시장에서 온 말)의 합성어로 '세월을 아끼라' 혹은 '시간을 아끼라'고 말한 엡 5:16과 여기 4절 외에는 갈 3:13, 4:5에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을 말할 때 쓰였는데, 특히 '율법'에 대해 우리를 구속하셨음을 가리킬 때 쓰였다.

하지만 위 ἀπολύτρωσις라는 단어는 율법과 연결해서 쓰지는 않았는데, 지난 1:14 '그 안에서 그의 그 피를 통해 그 놓임을 우리는 소유하고 있습니다 (곧) 그 죄들의 그 탕감 (입니다)'에서 '놓임'이라고 나는 번역했다. 이 '놓임'을 위해서는 반드시 λύτρον (인질) 라는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둘에는 큰 차이가 없지만, 이 '인질' 즉 대속할 수 있는 분은 죄인된 우리로는 할 수 없고 오직 죄가 없으신 주님만 가능하기 때문에 '놓임'은 오직 그리스도께서만 하실 수 있는 것에 비해, 이 '아끼라 ἐξαγοράζω'는 '매매'를 뜻하는 말로 우리가 시간 혹은 세월에 대해 즉 이미 구원받은 자신의 삶에 대해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도 '매매' 즉 무언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러한 대가는 바로 현재 이 시간을 아낌으로 과거 허비했던 시간들을 되사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허비함으로 잃어버린 과거 많은 시간들이 있지만, 그리스도와 동행함으로 그 잃은 시간을 만회할 수 있는 것이다.

성도들 간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사귐 혹은 교제 즉 '코이노이아'인데, 이 사귐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도 그 이유인데, 이 참된 코이노니아 안에 가르침이 있고 합심기도가 있고 생명의 교류와 나눔이 있다. 이러한 친밀한 사귐은 그래서 성도들 간에만 가능한 것이고 따라서 교회 밖의 사람들과는 이렇게 친밀하게 사귈 수도 없고 사귀지도 말아야 한다. 그들의 생활 방식을 다 좇아 행하지 않고 단지 생활에 필요한 만큼만 사귀면 충분한데 그것이 바로 시간을 아끼는 것이다. 외부인들의 삶의 목적은 세상에 속한 것이고 결국은 썩을 것들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또한 성도들 간에도 중요한 것은 지혜안에 걷는 것이며 동시에 '말을 항상 은혜 안에 소금에 맛 내어졌음으로' 하는 것이다.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성도들의 말은 뻑뻑하지 않고 소금으로 양념한 것 처럼 부드럽고 맛깔나게 해야 하며, 그래야 외부인들이나 성도들에 대해서 어떻게 대답할 지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아는 것이 마땅하다'고 6절은 말한다.

주님, 기도를 지속하고 주의 종들을 위해 기도하며 지혜 안에 걸으며 짧은 인생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이제까지 허비했던 시간을 되사오며 서로 은혜로운 말을 할 줄 아는 것이 마땅함을 배웁니다. 주께서 오늘 우리 가운데 참된 사귐으로 인도하시고 특히 우리 입에 은혜가 넘치기 원합니다. 비난이나 조소의 말을 그치고 축복의 말과 감사가 넘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