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였지만 자유를 누림 (골 4:7-18)

골로새 비교적 작은 크기의 마을이었지만 이 서신서는 다른 서신서들에는 쓰이지 않던 단어들이 많고, 특히 에바브라 (12절)나 오네시모 (8절) 등 귀한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많이 배출된 곳임을 가만하면 특별한 곳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헬라적 요소가 강했던 지역이 아니었나 한다.

골로새서를 마무리 하면서 여러 이름들을 열거하며 서로 안부를 전하게 하는데, 12-13절에는 1:7에 이미 언급했던 에바브라를 한번 더 말하며 그의 충성과 열심을 증언한다. 바울은 현재 수감되어 있지만 그의 여러 신실한 동역자들이 있기 때문에 그가 직접 사역을 하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편지를 쓰는 방법으로 대신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여러가지 제약에 묶여 있을 때가 많은데, 법적인 제약을 비롯, 재정적, 신체적, 언어, 문화, 사회 등등 여러 제약들은 마치 우리가 수감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하지만 복음은 묶이지 못하는데, 우리가 여러 제약에 의해 묶인다 해도 그 가운데에서도 사역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지난 1:29에 '이 안으로 (앞 28절의 '성숙케 함') 나도 내 안에서 능력 안에 일하시는 분의 일을 따라 싸우며 수고하고 있습니다' 라고, 그리고 바로 뒤 2:1에는 '여러분과 라오디게아에 있는 사람들과 내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최대한의 싸움을 소유하고 있는지 여러분이 알기를 원합니다'라고 기록했다. 그는 육신으로는 묶여 있고 또 떨어져 있었지만 (2:5) 영으로는 자유로와서 골로새 사람들과 함께 있던 것 뿐만 아니라 최대한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

11절을 원어에 가깝게 번역하면 '또 유스도로 말해지는 예수가 (인사되어집니다). 할례파에서 나온 (사람)들로서 오직 이들이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의) 동역자들로서 나에게 위로가 되어졌습니다' 정도가 되는데, 이 '유스도로 말해지는 예수' 부분은 주격으로 앞 10절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조카 마가'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앞의 '인사되어지다 (수동태, 아마도 바울에 의해 안부를 전하기 때문인 것 같다)' 라는 동사를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과거 이름이 주님과 같은 '예수'였지만 이제는 '유스도'라고 말해지고 있다 (현재진행형).  그러면서 바로 '할례파에서 나온' 이라는 말을 하며 '오직 이들이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의) 동역자들로서 나에게 위로가 되어졌습니다' 라고 기록한다. 바울은 과거 '예수'라는 유대계 이름으로 유대교에 있던 이가 이제는 '유스도'라고 개명하여 '하나님의 왕국 안의 동역자'가 된 사람 같이 이러한 이들이 자신에게 위로가 되었다고 말한다. 당시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통해 골로새 역시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그리스계와 유대계, 할례와 무할례, 야만 스구디아계 종 자유인 (3:11)' 등이 공존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과거 유대계 등의 출신은 무의미해졌다.

이 '위로'라는 말을 좀 더 공부해 보면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경 거의 대부분 '위로'는 '빠라깔레오'로 되어 있어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위로해 주시는 것을 말하지만, 여기는 단 한번 나오는 '빠레게이오' 라는 말로 앞의 '빠라'는 같지만 뒤에는 '아고라 (시장, 광장)'의 합성어이다.  무언가 시끄럽고 역동적인 느낌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현실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에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도 필요하지만 뒤죽박죽 시끄러운 현실에서 위로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어차피 현실이라는 말과 '진리' 혹은 '참' 혹은 '실재' 모두가 헬라어 '알레떼이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참된 현실 즉 영적 실재의 위로를 통해 복잡한 현실 가운데 위로를 이끌어 온다.  현실은 묶였지만 참된 실재는 그리스도 안에 자유이기 때문이다.

골로새는 위치적으로 라오디게아와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15-16절은 라오디게아 형제들과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에게 인사하라고, 또 골로새서를 라오디게아 안에 (있는) 교회에서도 읽혀지게 하라 명한다. 육신적으로 묶이지 않았을 때는 항상 움직이며 전도 여행을 다녔던 바울이지만 이제 묶였음에도 더욱 더 열심으로 일한다. 여러 종교적 제약이나 사람들간의 이해관계를 무시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특히 과학 기술의 발달로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참된 교제는 직접 만나서 함께 떡을 떼며 (혹은 빵을 나누며) 하는 것이 맞겠지만, 그 어떤 이유에서든 직접할 수 없다면 바울의 경우를 묵상하며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바울은 다시 한번 18절에 (아마도 눈이 침침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내 손으로 (썼다)'고 하고, '여러분은 나의 갇힘들을 기억하라'고 명한다. 그는 수감됨으로 제약을 받았고 그의 육신 역시 제한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 라고 하며 마치는데,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은혜'였음을 볼 수 있다.

주님, 너무도 자유로운 상황에 있음에도 섬김과 사역에 게으른 제 자신을 볼 수 있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의 그 은혜를 더 묵상하며 이제 여러 제약들과 도전들에 대해 더 이상 묶이지 않고 주께 순종하기 원합니다. 나의 능력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지만, 나의 약함이 오히려 내게 강함이라는 말씀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은혜만이 드러나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