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지 않고 끝까지 자기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믿음임 (렘 5:20-31)
오늘 말씀은 흥미로운 내용이 매우 많다. 21절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유다 백성들에게 그래도 '들으라' 명하신다. '듣지 못하다'의 시제가 미완료이기 때문에 이제까지는 듣지 못했어도 이제는 들으라는 의미다. 만일 아예 들을 수 없는 이들이라면 말씀하시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동시에 이 시대를 사는 이들에게도 희망이 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들으라 하신다.
22절의 핵심은 주를 두려워함이다. 주의 살아계심을 안다면 두려워 할 수 밖에 없는데, 절대주의를 배척하고 철저히 모든 것을 상대적으로 보며 해석하려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상대성을 오히려 절대적으로 삼기에 그 자체가 논리적으로 모순되는, 결국은 하나님을 배반한 것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모래로 바다의 경계를 삼으셔서 아무리 파도가 쳐도 그 경계를 넘지 못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이 '넘다, 아바르' 라는 말은 정해진 어떤 기준이나 경계를 뛰어 넘는 것을 말하며 영어 trespass 즉 죄를 범하다라는 말과 연결된다. 사실 죄의 의미가 원래는 단지 나쁜 일을 하는 것이라기 보다 어떠한 것이 정해진 기준에 따라 그것을 넘었는가 아닌가에 달렸는데, 그렇게 파도가 쳐도 경계를 넘지 못하는 바다를 예로 들며 23절은 그러한 경계를 지키는 바다에 비해 '이 백성'은 '이미 배반하고 떠났다'고 말씀한다.
주의 백성은 주님 그늘 아래, 그 경계 안에, 그 다스리심 안에 또 그 보호하심과 도우심 아래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것을 무시하고 떠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죄가 된다. 그래서 아무리 착하게 보이는 일들을 많이 한다고 해도 주님의 그 경계 (dominion)안에 즉 그의 왕국 (kingdom) 안에 있지 않으면 주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삶을 살다 허무하게 죽는 것이 그 마지막이 된다 (31절).
이렇게 자기 위치를 떠나는 죄의 근원은 이미 창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사탄으로 시작됐는데, 그래서 유 1:6은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며' 라고 사탄의 근원을 밝힌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을 때 그의 사자들로 존재하지만, 그러한 지위와 처소를 떠나게 될 때 사탄 마귀가 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우리 역시 그 분 안에 있으면 그분의 백성과 아들들이 되지만, 그를 떠나 마음대로 살면 부지간에라도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인들이 되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마 10:22, 24:13,막 13:13에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기록하는데, 히브리서 역시 이 '끝까지'에 대해 '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3:6),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3:14)' 라고 말씀한다. 믿음 생활은 '끝까지' 하는 것이고, 우리가 은혜로 받은 구원과 주님의 그 영과 우리에게 허락하신 그 왕국의 경계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다.
또 흥미로운 것을 두 가지나 더 발견할 수 있는데, 27-28 절은 부유하게 되자 하나님을 잊고 떠나며 궁핍한 이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무시한다고 말씀하는데,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가 주님 없이도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고 여길 때이다. 부자라고 해서 돈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자체가 부유해짐으로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게 될 때가 바로 내가 부자가 되는 때임을 말씀한다. 그러고 보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굶어 죽는 사람은 지난 수 천년 역사에 비해 거의 찾아볼 수 없는데, 물론 '상대적 빈곤'은 사람을 위축하게 만들 수 있지만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없는 사회가 된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영적으로 궁핍하게 되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30절 '이 땅에 무섭고 놀라운 일이 있도다'라고 한 것인데, 이에 대해 31절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라고 말씀하신다. 경악하며 무서워할 만한 일이 자연재해나 사회적 혼란 혹은 기근이나 역병 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야 하는 선지자들이 거짓을 말하고, 백성들을 하나님께 인도해야 할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방법대로 섬기는 대신 각자 자기의 소견대로 일을 하고, 사회 전체적으로 이러한 현상에 대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는 이러한 풍조라는 말씀이다. 지난 1절에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를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연결해 주는 이들인데, 그들이 제대로 일을하지 않고 있으며 그러한 것을 백성들도 좋게 여긴다. 하나님과 사람들의 관계가 깨어진다...
주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내치지 않으십니다. 아직도 '내 백성 (31절)' 이라 부르시며 그 '마지막'을 염려하심을 봅니다. 주님은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긍휼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과거 구약의 하나님께서 이제 오늘 우리 안에 계시고 영원히 우리를 인치셨음을 믿습니다. 주님의 그 넓으신 범위 안에서 기쁨과 자유를 만끽하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