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의 자아를 버리고 참된 평안을 추구함 (렘 6:1-15)
7절은 '샘이 그 물을 솟구쳐냄 같이 그가 그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탈취가 거기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 계속하느니라'고 기록하는데, 천연적인 인간의 실상을 폭로한다. 인간의 실존은 죄(단수)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에 결국 죄들(복수)을 낼 수 밖에 없고 죄인의 삶을 산다. 개정역 마 12:35은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하는데, 원어에 없는 '쌓다'라는 말을 추가했기 때문에 마치 '적선' 혹은 '적악' 즉 자신이 살면서 '쌓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지만 킹제임스 흠정역은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보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악한 보고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고 원어에 맞게 번역했는데, 같은 내용의 눅 6:45도 마찬가지다. 죄인은 그 안의 보고가 죄이기에 죄들을 낼 수 밖에 없지만, 주님을 믿는 주의 백성은 자신의 그 죄들과 추함을 토해내는 그 보고 즉 자아에 십자가를 적용하고 대신 주님의 생명과 영을 취하고 소유함으로 선한 것을 낼 수 있다.
킹제임스 흠정역 10절은 '주의 말이 그들에게는 치욕거리가 되며 그들이 그것을 기뻐하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했는데, 백성들은 주님의 경고의 말씀이 그들을 위한 것임에도 그 거룩한 말씀을 치욕거리로 혹은 잔소리로 여겼고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11절은 '그러므로 주의 격노가 내게 가득하여 내가 참는 데 지쳤노라. 내가 그 분노를 밖에 있는 아이들에게 쏟아 부으며 함께 모인 젊은이들에게 부으리니 심지어 남편이 아내와 함께 잡혀가며 날수가 충분히 찬 자와 노인이 함께 잡혀가리로다' 라고 말씀한다. 주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은 오랜 시간을 참으시지만 영원하지는 않다. 주님의 인내가 그칠 때가 있는데, 거기에는 심판이 따른다. 그 심판이 이르기 전에 사람들은 여호와께 돌아가야 한다.
다시 킹제임스 흠정역 14절은 '그들이 또한 내 백성의 딸의 상처를 조금 고쳐 주고는 평안이 없는데도 말하기를,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였도다'라고 하는데, 바로 앞 13절의 선지자로부터 제사장에 이르기까지 당시 모든 사역자들은 적어도 하나님 말씀으로 섬기기는 하기 때문에 '내 백성의 딸의 상처를 조금 고쳐' 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소위 '삯꾼'이라 백성들의 상처를 자신의 것으로 여기지 못하고 '평안하다'라고 거짓을 말한다. 그들은 환경적으로도 내적으로도 평안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특히 심판이 임박했음에도 거짓으로 평안을 예언한다. 주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을 제공하시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적 평안을 말씀하신다. 그래서 환경적으로는 '근심'과 '두려움'이 올지라도 주님의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말씀인데, 이것은 주께 온전히 붙어있을 때 가능하다. 주님께서 평안을 말씀하신 또 다른 구절 요 16:33은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도 주의 제자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을 말씀한다.
주님, 믿음 생활에서 편안함과 형통만을 바라고 원하는 마음이 제 안에 존재하는 죄의 보고인 자아로 부터임을 봅니다. 저의 자아는 십자가를 적용하는 것만이 해답임을 인정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평안을 묵상합니다. 영원에 잇대어 오늘을 사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