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방성의 관계와 말씀이신 주님 (렘 11:1-8)
이제까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속해서 '내 백성'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과거 주가 맺으신 언약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바꾸지 않으신다. 문제는 그들이 여호와를 그들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있는가 라는 것인데, 4절은 '너희는 내 목소리를 순종하고 나의 모든 명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직도 그의 백성이라 말씀하시지만, 그와는 반대로 이스라엘은 불순종함으로 하나님을 그들의 하나님으로 모시지 않았다.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인 것인데,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신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의 언약을 바탕으로 그들을 인도해 오셨다. 그래서 다시 '언약'이라는 말이 6번이나 언급되는데, 원어에는 2,3,6,8 절에만 '언약'이고 4절은 앞 3절에 대한 관계대명사 (which), 그리고 5절은 '맹세'를 '언약'으로 번역한 것이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리라'는 말씀은 물론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이것 역시 '그림자 (골 2:17)' 이기에 궁극적인 '언약'이라 말하기는 미흡하다. 언약은 물질이나 보상이 아니라 '관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언약'의 히브리어 '베리뜨'라는 말은 그 말 그대로 '약속' 이라는 의미이며 그 어원을 찾을 수 없는 독특한 단어다. 흥미롭게도 우리말 (혹은 한자) '언약 言約'은 문자 그대로 '말로 약속하다'인데, '약속 約束'은 '맺을 약' 이라는 글자와 '묶을 속'의 합성어로 어떠한 둘 사이를 맺고 묶는다는 의미다. 흥미롭게도 중국어 성경 여러 번역본에는 이 '언약'을 '約的話' 즉 '약속의 말'로 번역했는데, 한글 번역은 '언약' 즉 '말로 하는 약속'으로 했다는 것이다. 즉 중국어는 '약속의 말'이지만, 우리 말은 '말의 약속'이라는 점이 특이한데, 원래 '약속'은 어떤 계약서를 쓴다기 보다 '말'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이 중요한데, 1절 '말씀' 2절에는 '언약의 말씀들' '말하라', 3절도 '말씀' '언약의 말씀들' 4절 '명령' '목소리' '순종' 5절 '증언' 6절 '이르시되' '선포' 7절 '목소리' '순종' 8절 '순종' 귀를 기울이다' '명령' 등 모든 것이 '말' 혹은 '말씀'이다.
요한복음 1장은 주님께서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 이라고 증언하는데, 이렇게 말씀이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 인간이 말을 할 수 있고 듣고 이해할 수 있는 창조체라는 것은 매우 놀라운 것인데, 지구상 수많은 생명체들 가운데 인간만이 주님과 양방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다. 즉 원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인간은 창조되었기 때문에 따라서 하나님을 닮고 하나님과 하나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성육신' 즉 인간으로 오셨다.
주님, 오늘도 말씀하시는 언약의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이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고 내 안에 거하십니다. 주의 말씀으로 오늘 다시 새롭게 하시고 생명으로 충만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