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주되심, 그 주권을 인정하고 의지함 (렘 11:18-12:6)
주의 일을 행할 때, 특히 주의 말씀을 전할 때 드러내서 대적하는 무리들도 있지만 교묘히 숨어서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비방하는 무리들이 있다. 더우기 그러한 이들은 '아나돗' 즉 생명의 삶 해설같이 같은 교인들이거나 친지 혹은 형제 자매가 될 수eh 있다. 그들의 행태는 '함께 박멸하자 그를 살아 있는 자의 땅에서 끊어서 그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라며 매우 악독한데, 신실하게 주의 일을 행하는 자는 이러한 공모를 대개 '알지 못'한다 (18절). 하지만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주의 종은 그들에게 직접 대항하거나 변명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그 '원통함을 주께 아뢰'고 그들에 대한 보복을 주께 맡긴다 (19절).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주권자이심을 확실히 인정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인간의 악함과 연약함을 또한 알기 때문이다. 자신 역시도 불의한 인생들 가운데 살면서 그 입술도 부정하며 생각 또한 계속 다룸받지 않으면 그들의 것과 큰 차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주님을 믿으며, 신앙생활을 하며 너무나 힘든 경우가, 신실하게 말씀에 입각해 사는 신앙인들의 삶은 너무 힘들고, 세상 사람들이라면 기꺼이 취했을 여러 기회들을 주님의 말씀에 따라 산다는 이유로 포기해 버리며 결과적으로 여러면에서 계속 어려운 (특히 재정적으로)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어쩌면 다른 이들에게 참된 신앙의 삶의 모습을 부정적으로 비출 수 밖에 없는, 그래서 어쩌면 의기소침해질 수도 있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 예레미야 역시 같은 것을 토로한다. 앞으로 임할 주님의 심판에 대해 계속 예언하지만, 현재는 주를 떠난 사람들이 오히려 너무 잘먹고 잘살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 대한 심판의 말씀이 먹히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믿음 때문에 살기 힘들어 하는 이들이 조롱받는다. 하지만 이것이 참된 신앙의 삶이다. 고난이 없는 삶은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대놓고 주를 거역하는 이들이 잘 되고, '악한 자의 길이 형통하며 반역한 자가 다 평안'한데, 어떤 이들은 '입은 주께 가까'운 이들로서 겉으로 보면 신앙인들, 교인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주께로부터 멀다. 이들에 대해 예레미야는 그들의 심판을 주께 구하는데, 상대적으로 잘사는 그들에 대한 시기심이 아니라 주의 말씀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들에 대한 심판을 아뢰는 것이다. 신앙인들로 자처하는 그들이지만, 정작은 단지 '교인'들로서, 말씀에 따르면 '가라지'이며 분명 심판 받을 것이다.
주님, 신앙의 근원은 주님이시고, 주님을 내 삶의 주인과 온 우주의 주로 모시는 것임을 압니다. 주님의 주 되심, 주이심을 잊지 않고 환경에 따라 생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주를 온전히 의지하는 신앙인으로 서게 하소서. 이에 대해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한다는 (빌 1:6) 바울의 말을 기억합니다. 주의 영으로 인도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