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할 줄 앎 (렘 14:1-12)

부끄러움을 당하기 전에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한다. 3절과 4절 '부끄럽다'는 마치 그들이 당한 처지를 부끄러워 한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지만 원어 '보쉬'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다 라는 의미는 물론 '부끄러움을 당하다' 즉 수동태로도 이해된다. 스스로 먼저 자신의 악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부끄러워함으로 회개하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겠지만 회개하지 않고 미루다 미루다 정작 시험을 당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5절 '들의 암사슴은 새끼를 낳아도 풀이 없으므로 내버리며'와 6절 '들 나귀들은 벗은 산 위에 서서 승냥이 같이 헐떡이며 풀이 없으므로 눈이 흐려지는도다'의 모든 동사는 완료형으로 과거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시간적으로는 미래에 일어날 것이지만 미완료가 아닌 완료형을 썼는데, 그 이유는 7절 '여호와여 우리의 죄악이 우리에게 대하여 증언할지라도 주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소서 우리의 타락함이 많으니이다 우리가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혹은 킹제임스 흠정역 '오 주여, 우리의 불법들이 우리를 치려고 증언할지라도 오직 주께서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그것을 행하소서. 우리의 타락이 많나이다. 우리가 주께 죄를 지었나이다'에서 알 수 있다. 이러한 심판은 상황적으로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에 마치 이미 일어난 것으로 묘사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죄악이 극심했던 것을 알았기에 심판을 무르시기를 구하지 않고 오직 주의 이름을 위해 즉 주님의 공의를 위해 심판하시기를 구하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을 아예 '버리지 마'실 것을 함께 구한다. 이에 대해 10-12절에는 주님께서도 같은 말씀을 하신다. 하나님은 아가페시지만 영원히 참으시는 분은 아니시다. 그의 공의를 위해 은혜를 저버리는 이들은 심판하신다.

주님, 주의 은혜를 묵상합니다. 주의 은혜를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자신의 부끄러움을 깨달을 수 있기 원합니다. 그럴 때 주 앞에 참된 주의 백성으로 설 수 있을 것을 믿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이들이 온전히 주께 돌아올 수 있도록 주의 일곱 영으로 오늘도 운행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