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냐 도성이냐 (시 107:1-9)
1절은 '감사하라 여호와께 (그는) 좋으시기 때문이다 그의 선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로 시작한다. '감사하라 (히 '야다')'는 '던지다, (화살을) 쏘다, 고백하다, 감사하다' 등의 여러 의미가 있는데, 하나님께 향해 외치며 감사하는 것을 마치 화살을 쏘듯 힘있게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이유는 바로 그가 좋으시기 때문이고 그의 선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좋다'라는 말은 정말 좋다라는 말이고 선하심 즉 '헤세드'가 영원한데, 이러한 고백과 감사는 오직 그 선하심을 경험한 즉 2절 '원수의 손에서 구원받은 주의 구원받은 자들'만이 할 수 있다. 우리가 정말 구원받았는지 알려면 우리의 삶에 감사와 찬양이 있는가 확인하면 된다.
원래 죄인된 우리들은 전에는 '주리고 목이 말라 그들의 혼들이 그들 안에 혼미했었다 (5절)' 이 '혼 (히 네뻬쉬)'는 창 1:20부터 나오는 단어로 살아있는 생명체, 인격체, 목숨, 갈망 등을 의미하는데, 우리의 육적인 모습이나 궁극적으로 인간 내면까지 아우르는 말이다. 겉으로 잘 먹고 잘 살아 보도 그 원래 창조되어진 목적에 이르지 못하면 우리는 주리고 목이 마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항상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데, 주의 구속을 받게 되면 그의 좋으심과 선하심을 알게 되고 '사모하는 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혼을 좋은 (것)으로 채우 (9절)'심을 경험한다.
흥미로운 것은 4절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거주할 성읍을 찾지 못하고' 라는 부분인데, 7절은 결국 '또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셨도다'라고 기록한다. 이 '성읍 (히 '이르')'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서 1095번이나 나오는 단어로 사실은 매우 중요한 말이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위해 동방에 동산을 창설하셨지만, 아마도 그 동산은 그 사이즈로 볼 때 영원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사람은 범죄해서 동산에서 쫓겨났는데 (실락), 그 후에 가인이 바로 한 것이 바로 '성을 쌓(창 4:17)'은 것이었다. 성을 쌓은 것은 안전을 위함인데, 하나님을 떠난 불안한 인생은 그들의 성을 쌓는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도 인간에게 도성을 약속하시고 결국 '바른 길로 인도하사 거주할 성읍에 이르게 하'시는데, 구약에는 바로 예루살렘이고 이제 신약에서는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이다. 과거 동산은 완벽한 곳이었고 이를 회복하는 것 (복락)은 귀한 것이지만, 실재적으로 그것은 너무 작다. 세상이라는 황폐한 광야를 헤매는 혼들이 주께 구속 받음으로 그 도성 안 즉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인도하심을 받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이것은 소위 '실락원'과 '복락원'을 초월하는 영원한 약속이다.
주님, 주의 몸된 교회에는 여러 모습이 있는 것을 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는 새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구원하시며 영원히 거주할 주의 도성으로 건축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