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순종 (시편 112편)

1절은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기록하는데, '계명'과 '복'이 함께 있다. 신약의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를 연상하게 하는데, 최근 어떤 설교에서 말씀을 잘 분석하는 것 보다는 순종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을 들었다. 하지만 결코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그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올바른 분석과 해석은 피할 수 없다. 주님께서도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마 24:15, 막 13:14)' 혹은 '깨닫지 못하느냐' 라고 물으셨고, 바울도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 여러 번 언급하며 '깨닫는' 것이 필요함을 말하는데, 말씀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는 것이 우선이지만,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수 없는 구절들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눈이나 손이 죄를 지으면 뽑아버리고 찍어 버리라고 하셨던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는 없다. 과거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몇몇 특정 인종을 몰살하라고 하셨거나 동성욕자들을 죽이라거나 혹은 부모를 거역하는 자를 죽이라는 등의 계명은 이제 더 이상 그대로 적용하며 순종할 수는 없는 문제다.

말씀을 순종함에 있어, 무작정 순종하는 것은 미신이며 맹신으로 빠질 수 있다. 아브라함도 아들을 바치기 위해 3일 길을 가야했는데, 그 길에서 많은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길을 걸으며 이제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며 그 생각과 영 안에서 계속 주님과 교제했을 것이다. 혹여라도 생각을 달리하면 3일 중 아무때라도 길을 돌이킬 수 있었다. 참된 순종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순종은 먼저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의 어떠하심을 깨달아야만 가능하다.

'할렐루야'로 음역된 말은 원어로는 '할랄'이며 문장에서는 '할루 (복수 명령형)'로 되어 있는데, 그 원의미는 '(빛을) 비추다, 자랑하다, 찬양하다' 등이며, 바로 뒤에 '여호와'의 줄임말인 '야'가 따라와서 '할루야'로 된다. '야'라는 말은 많은 사람들 이름에 쓰였는데, '여 (영어로는 je)'로 시작하는 이름이나 혹은 '야'나 '샤 (영어로는 jiah)'로 끝나는 이름에 쓰인 말이다. 주님을 찬양한다는 말은 먼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시작하는데, 그 분은 위대하시고 두려워 할만 한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 하는' 것이며 이렇게 찬양하는 자는 '복이 있다'.  주님께 찬양드리거나 그를 자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계심을 믿고 그를 두려워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의 명령들을 크게 즐거워해야 하는데, 요일 5:3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라고 기록한다. 계명들을 크게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그 계명들을 지킬 수 있고, 복잡하고 무겁게 보이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시고 우리가 주님과 동행하면 지킬 수 있기에 무거운 것이 아니다.

주님, 말씀을 먹을 때 입에는 달지만 배에는 쓰다고 고백한 계시록 말씀을 기억합니다. 주님의 계명들은 무겁지 않지만 다만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와 연합될 때 순종과 변화의 고통이 따름을 봅니다. 오늘도 말씀하시고, 생명주시고, 변화시켜 주소서. 주님 앞에 무릎 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