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그리고 단체적으로 누리는 주님의 어떠하심 (시 118:19-29)
19절의 '문들'은 복수이지만 '의 (명사)'는 단수이다. 그에 비해 20절의 '문'은 단수지만 '의인들 (형용사)'은 복수이다. 문자적으로 이 '문'은 한 도시나 마을로 들어가는 '대문' 혹은 '성문'을 의미하는데, 보통 '성문'은 단지 한짝이 아닌 여러 짝의 문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큰 성은 복수의 문들이 존재한다. 이것은 소위 '진리'에 이르는 여러 다른 방법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에 이르는 문들이 크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문이 크다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려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들이 열릴 때 바로 하나의 진리 혹은 의로 들어갈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이 목적이다.
단수의 이 '문' 역시 '대문'을 의미하지만, 이 하나의 문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여러 '의인들'이다. 이것은 '문'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데, 신약에서 '대문 gate'을 가리키는 '풀레이'는 특히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마 7장에 나온다. 이것은 하나님의 왕국이 이러한 좁은 문을 통해야만 들어가는 것이 가능한 것을 말씀한다.
그에 비해 방으로 들어가는 '(작은) 문 door'도 있는데, 특히 주님께서 요 10:7에 '나는 양들의 문이라' 그리고 9절에서 '나는 그 문이다 (에고 에이미 헤 뚜라)' 라고 말씀하신 부분이다. 이 문은 주님과의 개인적이며 신비로운 교제와 연합을 의미하는데 '양들'은 복수로 되어 있지만 9절은 '나는 그 문이다. 만일 누구든지 나를 통해 들어오면 구원되어질 것이다 그리고 들어올 것이다 그리고 나올 것이다 그리고 꼴을 얻을 것이다 (원어 참조)' 라고 기록하며, 많은 양들이 이 문을 통해 들어오며 나올 것이지만, 그러한 누림은 항상 '누구든지 (단수)'로 일대일 관계에 있다.
이렇게 주님의 임재를 개인적으로 누리는 사람은 21절 이하 모든 것 또한 누리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한다. 21절은 '나의 구원' '내가' 등으로 말하지만 23절은 '우리 눈에' 그리고 24, 25, 26, 27절은 '우리가' 등 단체적으로 주님을 높이며, 다시 28절은 '나의' '내가' 나의' '내가' 등 다시 개인적인 면으로 돌아온다. 우리 신앙의 모습은 개인적면 만도 아니고 또 단체적인 모습 만도 아닌, 이 두가지 모두가 공존한다.
주님, 먼저 제가 주님을 높이고 그 구원을 찬양하며 감사하며, 그리고 주 안에서 형제된 자들과 함께 교제하기 원합니다. 이러한 누림에 들어가기 위해 '대문들'이 열렸음을 봅니다. 또한 우리의 참된 문이신 주님을 통해 들어오며 나오며 아버지께로 오기 원합니다. 우리가 주와 한 영 되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