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권위주의 (빌 1:1-11)

개인적으로 두란노 서원의 ‘우리말’ 번역을 개역개정역 보다 좋아하는 이유는 원어에 가깝게 번역됐을 뿐만 아니라 구어에서 오는 딱딱함이나 권위주의적인 느낌을 벗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삶 제목은 ‘사랑으로 기도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관계’라고 했지만, 현실적으로 한국 교회는 매우 수직적이며 제도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의 관계라기 보다는 목사 중심 그리고 직분에 의한 계급적 제도를 기반으로 한다.  이것은 소위 ‘주일 예배’에서 핵심이 ‘설교’이며 이 설교가 담임 목사에 의해 설파되어지기 때문이다.

빌립보서를 쓰는 당시 바울은 사슬에 매인 즉 감옥에 갇힌 상태였는데, 현실적으로 결코 자랑할 수도 또 권위를 부릴 수도 없던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 서신 특히 1장에서는 명령어가 27절에야 비로소 나온다.  옥중에 있음에도 하나님 주신 권위는 잃지 않았지만, 바울에 있어 그 어떤 권위주의도 찾아 볼 수 없다.

요즘 만일 기독교계의 주요 인물이 적법하지 못한 이유로 비슷한 편지를 보냈다면, 1절은 수신자들의 순서가 ‘감독님들과 집사님들 그리고 성도님들’ 정도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바울에게 있어 ‘모든 성도들’이 먼저였는데, ‘감독들과 집사들’은 이 모든 성도들을 세우기 위해 세움 받은 책임을 요하는 직분들 (정확히는 기능들)이기 때문이다.

5절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번역해서 마치 빌립보 교회 여러 성도들이 단지 ‘참여’하는 사람들로만 오해할 수도 있지만, 원어에는 이 ‘참여하다’라는 말이 ‘코이노니아’ 즉 ‘교제’로 되어 있고, ‘복음 안에 교제’로 되어 있다.  개역역은 마치 바울이 주도하는 사역에 참여한다는 것 처럼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바울이나 빌립보 성도들이나 모두 한 복음 안에서 교제하는 것이다.

개역역을 읽어 보면, 1절 ‘편지하노니’ 2절 ’있을지어다’ 6절 ‘확신하노라 (원어로는 설득되었습니다)’ 9절 ’기도하노라’ 11절 ‘원하노라’ 등등 매우 권위주의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원어에서는 겸손한 말투로 편지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권위주의적인 것을 지향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되기 원한다.  하지만 바울은 8절에 ‘하나님이 내 증인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그 근본은 ‘그리스도 예수의 심정’이라고 한다.  우리는 주님의 권위와 그 겸손을 배워야 한다.

주님, 저야말로 뼈 속까지 권위주의적인 사람이며 권위주의를 보며 익혀 온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제 자신이 하나님 되려는 이러한 더럽고 가련한 이 숨겨진 기질에서 저를 구원하소서.  다만 아가페가 지혜와 모든 분별 안에 더욱 풍성히 됨으로 특출난 것들이 무엇인지 증명하는 것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하소서.  주님은 참으로 무엇이 권위인지 보여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