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의 이슈, 함께 종노릇 함, 그리고 바울의 개인적 이서 (빌 2:19-30)

디모데는 바울에게 아들 같은 존재였고 (고전 4:17, 딤전 1:2, 18, 딤후 1:2) 또한 동역자였다 (롬 16:21). 사역 초기 디모데는 바울에게 아들 같았었지만, 로마서를 쓸 때 쯤 디모데는 이제 동역자로 성장했음을 볼 수 있다 (물론 기록 시기에 대한 의견 차이는 있다).

19절에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는 이유 중 하나가 '안위를 받으려 함'이라고 하는데, 원어로는 '유프수케'로 '좋다 eu'와 '혼 psuche'의 합성어이다. 이 단어는 여기 빌립보에만 나오는데, 사실 이제까지 이 '혼 psuche' 이라는 말과 더불어 연관어 혹은 합성어들이 종종 눈에 띤다. 우리는 신앙 생활에서 많은 때 '영적인' 것들을 중요시 하지만, 현실을 살며 이 '혼'의 문제 역시 매우 중요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실 이 영과 혼 둘은 뗄 수 없는 것인데, 그래서 종종 '영혼'이라 말한다.  이 둘은 물론 구분되어 지고 우리는 보다 영적인 것을 추구해야 하겠지만, 영적인 것은 눈에 쉽게 띠지 않는 것에 비해 이 혼적인 문제는 즉각적이며 보고 느낄 수 있고, 사역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앞에서 '기쁨'을 자주 언급했지만 영적인 기쁨이 있는 반면, 대게 기쁨은 우리의 혼을 통해 경험되는데, 마음이나 생각이 우울하고 어두운 가운데 있으면서 기쁨을 누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지금 바울은 '좋은 혼' 즉 마음을 안위받는 것을 소망하고 있다.

이것 뿐만 아니라 20절은 디모데 처럼 바울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이 없다고 하는데, 원어로 '이소프수코스'인데, '동등'을 뜻하는 '이소스'와 역시 '혼 psuche'의 합성어이다. 사역을 하기 위해서는 생각과 뜻을 같이 해야 하는데, 보통 '같다'는 'homo'를 쓰지만 여기서는 'isos' 즉 '동등, 동일'을 의미하는 말을 썼다. 지난 6절 '하나님과 동등됨' 에서 쓰인 말과 동일한데,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 동일한 개성이나 인격을 가질 수는 없지만 '동등한' 혼을 추구하며 닮을 수는 있다. 사역을 해보니 바울은 디모데가 이러한 성품의 사람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후에 바울의 동역자로 서게 될 수 있는 것이다.

디모데가 이렇게 바울과 동등한 혼 즉 성품과 인격의 동등함을 소유할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바울은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들만 추구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것들'을 추구해야 함을 말하는데, 바울이나 디모데나 바로 이러한 점이 동일했고, 이는 22절 즉 디모데의 성품이 이를 통해 연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하는데, 원어에는 '자녀가 아버지에 대하듯 그 복음 안에서 그는 나와 함께 종노릇 했습니다' 정도로 되어 있다. 디모데는 영적으로 바울의 자녀로 여겨졌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종노릇함은 바울에 대한 것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복음 안에서' 종노릇했다. 여기 '수고하다'로 번역된 단어는 '종이 되다 douleuo'인데, 바울은 디모데를 자신의 몸종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해 '함께 종노릇했다'.

25절 이하 에바브로디도를 언급하는데,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나의 mou' 라는 말이 두번이나 나오는데, 왜 '하나님의' 혹은 '그리스도'의 라는 말 대신에 '나의'라고 말했을까? 마치 바울 자신의 사역을 부각시키려고 하는 말 같이 들리지만 이는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하나님의' 라고 한다면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매우 일반적인 말이다. '그리스도의' 라는 말 역시 매우 객관적이며 증명하기 애매한 말이 될 수 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이 에바브로디도에 대해 소위 '이서 endorse' 하고 있다. 그럼으로 성도들에게 그가 신뢰할 만한 인품의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바울이 직접 그를 보증하고 있다.

더우기 바울은 30절에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말하는데, 빌립보 교회는 바울의 사역에 종종 도움을 주었지만 (4:14-16) 그러한 도움에 부족함이 있었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소위 '후원교회'에 '여러분의 후원은 조금 부족합니다' 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언급은 빌립보 성도들의 섬김이나 후원이 부족하거나 볼품 없다는 말이 결코 아니고 '채우다' 즉 완성하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그들의 섬김이 에바브로디도의 어떠함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한 '부족함'은 무엇이었고 어떻게 에바브로디도 만이 채울 수 있었을까?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필요했던 쓸 것을 보내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그에 비해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았다. 여기에 바로 차이가 있고 부족함을 채움이 있다. 이 '목숨' 역시 원어로는 '혼 psuche' 인데,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자신의 혼을 돌보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요 12:25에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고, 또 눅 9:23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생명'으로 번역된 말 역시 원어는 '혼 psuche'이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 능력만큼  드리는 '후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혼과 목숨 즉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것이다. 에바브로디도는 이러한 참된 드림을 통해 빌립보 성도들의 섬김을 온전하게 했다.

주님, 온 마음과 혼과 힘을 다하지 않고는, 또 십자가를 온전히 지지 않고는 주님을 섬기는 것에 부족함이 있음을 봅니다. 주의 노예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오늘 나의 혼을 드리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는 참된 주의 종들을 일으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