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 여김, 믿음, 그리고 믿음의 결국인 부활 (빌 3:1-11)

1절은 '끝으로' 라고 시작하는데, 지난 한글판에서는 '종말로'로 번역된 말이다. 하지만 원어로는 'ㄹ로이폰'인데, '드디어, 이제부터' 등을 의미한다. 즉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제부터는' 이라는 뜻이다. 다시 여기에 '기뻐하라'고 명하는데, 이러한 명령은 기뻐할 수 있는 상황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럴 수 없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믿음에는 대상과 내용이 필요한데, 바로 여기에 '지식'과 '여김'이 관여한다. 7절과 8절에는 원어로 '여기다 hegeomai'가 한번 씩 나오는데, 7절은 완료형이고 8절은 현재진행형으로 되어 있다. 주님을 만난 직후 그리스도 때문에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했던 모든 유익들을 해로 여겼었고, 이제 신앙 생활을 하면서 현재에도 계속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여긴다'는 말은 능동적인 느낌이 많이 드는 단어이지만, 둘 다 태가 중간/수동태로 되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근거없이 무언가를 어떤 식으로 꾸며서 여긴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이 의미 없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진짜다. 우리 자신이 무언가 자의적으로 짜내려는 것은 종교로 변질된다.

그래서 8절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지식 그노시스'가 있고 이는 10절 '알다 기노스코'와 연결된다. 지식이 중요한 이유는 대게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을 바탕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불이 뜨겁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손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이것은 경험과도 관계가 있기 때문에 경험은 중요하지만 어떠한 것을 전혀 경험하지 못했더라도 그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다면 그에 따라 행동한다. 주님께서는 요 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렇게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영생으로 인도하며, 그 자체가 영생이다.

그런데 8절과 10절의 '지식' 혹은 '알다' 사이에 9절은 '믿음'을 말한다. 개역역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라고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되어 있다. 물론 '소유격'이 목적격으로 이해될 때도 있지만, 문법적으로는 '그리스도를 믿음'이 아니라 분명 '그리스도의 믿음 (소유격)'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믿음 자체가 우리로 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즉 하나님으로 부터 온 것이며 따라서 '의'도 '믿음에 근거한' 것임을 말한다.  즉 '지식' '알다' '믿음' '믿다'는 함께 간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알고 믿(요일 4:16)'고 또한 '믿고 알 (요 6:69)'게 된다.

따라서 이 '지식'은 믿음과 동일하게 그 대상과 내용이 있는데, 10절은 '그와 그의 부활의 능력과 그의 고난들의 교제를 아는 것으로 (목적격)'이라고 하며 결과적으로 '그의 죽으심을 향해 동화되어져서' 11절 '어떻게든 죽은 자들 가운데 그 부활 안으로 이르고자 할까 하는 것입니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다른 것들을 버림으로 얻어야 하는 지식은 주님 당신 자신과 주님의 부활의 능력과, 동시에 주님의 고난들의 교제인데, 주님을 알면 알수록 부활의 능력으로 촛점이 맞추어지고, 이는 부활을 위해 고난과 죽음이 요구됨을 알게 되어 그 안으로 교제하게 된다는 의미다. 결국 '주님의 죽으심을 향해 동화'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부활이 자동으로 되는 것 같지 않다는 것이다. 9절 '발견될 까' 그리고 11절 '이르고자 할까' 등 원어에서는 직설적이 아니라 '가정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만 믿으면 구원받고 자동으로 주님 재림하실 때 부활할 것이라 보통 생각하지만, 이제까지 기록한 대로 지식과 믿음과 그에 따른 고난 받음과 죽음까지 이르는 것이 요구된다. 주님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이 바로 이를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벧전 1:9는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고 하는데 '영혼'은 원어로 '혼'이며 이 단어는 '목숨' '인격' '자신' 등을 의미한다. 즉 우리는 소위 '영혼'만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인격체 영혼육이 온전한 구원을 받는 것이 바로 믿음의 마침이라는 것이며, 그래서 행 17:18은 '몸의 부활'을 말한다.

주님, 알고 여겨지고 믿고 부활되기 원합니다. 우리의 지식이 바뀌고 변화됨으로 더욱 올바른 지식 안에 자라가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