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생활의 비밀: 투구, 인식화, 걸음, 본받음, 소유함 (빌 3:12-21)

바울은 사도임에도 이미 얻었거나 온전히 이루었다 하지 않고 아직도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고 말한다. 그 목적은 부활이며 그에 대한 요구인 고난과 죽음도 포함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되는 것이고 이것이 '이미 얻음' 혹은 '온전히 이룸'이 된다. 일상에서 그리스도와 전혀 상관없이 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온전한 부활을 얻으려면 삶 전체에서 그 분과 동행하며 그 분께 사로잡혀 살아야 한다. 이를 위해 바울은 '달려간다' 라고 하는데, 이 단어는 신약에 매우 자주 사용된 단어로 6절의 '교회를 핍박하'다 라는 말과 동일하고, 신약에는 '핍박하다' 혹은 '박해하다'로 많이 번역되었다. 즉 달리고 추구하는 것이 마치 남을 (혹은 어떤 목적을 향해) 핍박하는 것 처럼 분투하며 전력질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단지 '달리다'라는 말은 그 뉘앙스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부분은 '투구(鬪求)'하다 라고 번역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투구'라는 단어는 한국어로는 쓰이지 않지만 한자권에서는 럭비 같은 종목에 가끔 쓰이는 말이다. 즉 분투하며 추구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  이러한 투구함을 위해서는 이러한 목적에 아직은 도달하지 못했음을 분명히 보고 지난 것들은 잊고 앞의 것들을 향해 내 자신 모두가 뻗어져야 한다 (13절). 그래서 14절은 '푯대를 향해 좇아'갈 것을 말하는데, 그 푯대는 다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 분의 완성하심이다.

15절에는 '이렇게 생각할지니' 라는 말이 있는데, 원어 '쁘로네오'는 지난 번에도 언급했지만 단지 '생각하다'라는 의미라기 보다는 어떤 생각에 전념하거나 그렇게 생각하도록 의식 혹은 인식화 하는 것을 말한다. 같은 단어가 19절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 '땅의 것들'에 대해 인식하며 추구하는 것을 또한 기록했다. 즉 어떤 한 방향으로 생각한다는 뜻인데, 이것은 기질이 바뀌어야만 가능한다. 그래서 이 동사는 가정법으로 쓰였다. 이렇게 생각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훈련을 하는 중에 '만일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즉 딴 생각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것을 보여주셔서 우리가 다시 생각을 고쳐 먹을 수 있도록 하신다고 말씀한다. 3장에는 많은 동사들이 중간태 혹은 수동태로 되어 있지만, 이 '인식화하다'는 능동태로 되어 있어서 그 책임이 우리에게 있음을 말씀한다. 이렇게 생각을 훈련하는 것은 '온전히 이룬 자들' 바로 우리들 가운데 성숙한 이들이 하는 것이다.  즉 생각이 성숙하면 성숙한 말이 나오고, 이는 바로 성숙함을 의미한다.

16절은 한글이나 영어나 거의 모든 번역이 '~하자'로 되어 있지만 보통 그러한 권유형은 아오리스트 시제에 가정법으로 되어있는 반면, 여기는 현재진행형 직설법으로 되어있다. 그래서 '아무튼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동일한 인식의 다스림으로 동일한 것을 걷고 있습니다'로 번역할 수 있는데, 바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살 수 밖에 없음을 말하고 있다. 좀 더 부드럽게 번역한다면 '아무튼 우리는 어차피 우리가 하는 생각대로 살고 있기 때문 입니다' 정도가 되겠다.

그래서 17절은 특히 이러한 생각의 문제에 대해 형제들에게 바울 자신을 본받으라 권유하는데, '되라'는 동사는 수동태로 '되어지고 있으십시오'이다. 특히 이 17절에는 믿음 생활의 비밀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개역은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이라고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우리의 본을 소유하고 있는 것처럼' 으로 되어 있다. '본받는 자가 되는' 문제가 '되어지는' 즉 수동적인 문제이듯, 이 '본받는' 것 역시 우리 힘으로 본받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본을 '소유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비밀이다.

이러한 '소유함'은 주님께서 하신 명령에도 드러나는데, 개정역은 요 13:35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번역했지만, 원어에는 '너희가 서로 아가페를 소유하고 있으면' 으로 되어 있고, 이 아가페는 바로 주님 자신이시다. 우리는 '하는 것' 이전에 '소유함'이 있어야 함을 배워야 한다. 이것이 바로 신앙 생활의 기본이고 이에서 벗어나는 것은 종교일 뿐이다.  이러한 '소유함'을 바탕으로 '걷는' 것이 생기는데, 그래서 17절은 '그렇게 걷고 있는 자들을 눈여겨 보고 있으라'고 명한다.  '걷는' 것은 '행하는' 것이고 또한 '사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산다.

20절에는 '시민권'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어의 의미는 '공동의 재산 commonwealth'으로 '권리'를 의미하기 보다는 '나눔'의 의미가 더 크다. 신약에는 단 한번 나오는 단어인데, '시민으로 살다'라는 말에서 파생되었고, 그 어원은 거슬러 올라가면 '도시'를 의미한다. 즉 모여 살며 이루는 공동체를 말하고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이 '시민권'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민권이 흥미롭게도 '하늘들 안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이 땅에는 아직 시민권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그 날이 오면 시민권은 이 땅에서 온전한 현실이 되겠지만, 지금 이러한 공동의 삶을 살려면 우리는 하늘 안에 있어야 함을 암시한다.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미 온 그러나 또한 아직은 오지 않은 하나님의 왕국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모든 비밀을 살게 될 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려지고 있 (수동태)'는 것이 된다. 주님이 우리 신앙의 목적이고 목표이며 푯대인데, 21절은 '우리의 천한 몸을 그분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형상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구원은 단지 '천당 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완성이다.

주님, 신앙의 비밀을 더 알고 경험하기 원합니다. 우리 안에 주님을 더욱 소유하며 이러한 소유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오늘 우리를 하늘들 안에 두시옵소서. 많은 것들로 복잡하고 스트레스 받는 이 땅이지만, 그러한 가운데도 하늘의 것을 추구하며 우리의 생각과 기질과 인식이 주님을 향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