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과 동시에 관계에 의한, 그리고 관계가 이끌며 관계로 드러나는 사역 (빌 4:1-7)

4장을 시작하며 (물론 원어에는 장 구분이 없지만) '사랑스러운 이들이여'라고 두번이나 빌립보 성도들을 부른다. '사랑하고' '사랑하는 자들아' 모두 동일한 형용사 호격으로 되어 있는데, 그래서 '그러므로 사랑스럽고 사무치게 그리운 내 형제들이여, 내 기쁨과 면류관이(여), 이처럼 주 안에서 굳건히 서 있으라, 사랑스러운 이들이여'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하면서 그들에 대해 얼마나 사랑스러워 하고 또 사무치게 그리워하는지 말하고 있다. 믿음은 냉철한 이성도 필요하지만 따뜻한 감성도 반드시 요구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이들은 모두 사랑스러운데, 하나님의 아가페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2절에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동일한 마음을 품으라고 권유하면서 3절은 '그렇습니다'로 시작하며 '또한 진실한 (나와) 멍에를 같이 멘 자 그대에게도 부탁합니다 복음 안에서 나와 동역한 이 분들을 도우라 그리고 클레멘트와 그 밖의 나의 동역자들(이니) 그들의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하며 이제까지 복수를 대상으로 하는 동사를 썼지만 3절은 단수격 동사에 '그대'라고 2인칭 단수를 썼다. 바울과 '같이 멍에를 멘 자'는 과연 누구였을까? 아마도 이 빌립보서를 읽는 사람 중에 바울과 함께 멍에진 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면 이 말씀을 받을만 했을 것이다.

동시에 문맥적으로 보면 2절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하는 명령일 수도 있다. 우리 말에는 '유오디아와 순두게' 둘로 되어 있지만, 원어에는 '유오디아를 (내가) 권유하고 또한 순두게를 권유합니다'라고 따로 되어 있다. 이 둘에게 한꺼번에 권유하는 것이 아니라 따로 따로 같은 동사를 두번 쓰며 권유하는데, 이 '권유하라'는 '빠라깔레오'로 성령께서 우리를 위로하시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은 단어다. 이것은 3절이 '그렇습니다 nai'로 시작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데, 이 말은 앞 2절에 대해 '맞습니다. 그렇습니다'라고 연결하며 바로 이 2인칭 단수가 이 빌립보서를 읽고 있는 각 개인이기 이전에 바로 유오디아 한 개인 그리고 또 순두게 한 개인에게 각각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사역에 있어서 이 둘의 마음이나 지향함이 갈렸는데, 그럼에도 그들의 사역이 틀렸다거나 무익하다고 하지 않고 단지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유하며, 더우기 그들에게 동역한 사람들과 클레멘트 등 그 외에 동역자들을 도우라고 부탁한다. 사역은 무언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그것은 자신의 사역을 고집하는 대신, 다른 이들을 함께 도울 때 그 진가와 의미가 드러난다.

4절은 원어로 '주 안에서 항상 기뻐들하고 있으라. 내가 다시 말할 것입니다. 기뻐들 하라' 정도로 되어 있는데, 이 '기뻐하다'가 빌립보서에는 자주 나온다. 그만큼 신앙 생활에서 기쁨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일' 보다는 '관계'가 우선이 될 때 이 기쁨이 회복되는데, 바울은 현재도 기뻐하라고 명령하고, 미래 시제로 '내가 다시 말할 것'이라고도 한다. 이 동사는 2인칭 복수형으로서 기쁨을 위해서는 함께 해야함을 암시하기도 한다. 사람들간에 이해관계가 적어지면 스트레스 받을 것도 적어지지만 참된 기쁨은 관계를 통해 온다. 먼저 주님과의 관계 그리고 성도들과의 관계다.

그래서 5절은 '여러분의 배려를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십시오. 주께서 가까우(십니다)' 정도로 원어가 되어 있다. '관용'이라고 많이들 번역했지만, 관용은 너그럽게 용서한다는 의미로 남들이 나에게 무엇인가 잘못했을 때 가져야할 나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유오디아나 순두게는 각자가 제대로 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원어 '에피에이케이스'는 '공정한, 부드러운, 견디는, 정당한' 등을 의미하는 형용사인데, 그래서 영번역본 ESV에는 reasonableness 라고 번역했고 이는 남들에 대해 공정하게 배려를 베푸는 것에 더 가깝다. 남들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 간에 '정당함'을 먼저 고려하며 그들을 공정하게 배려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4절의 기쁨과 연결되며, '주께서 가까우심'을 그 이유로 드는 것이다. 이 '가깝다 (에구스)'는 시간적 공간적 모두 가까움을 의미하는데, 주님께서는 곧 오실 것이며 동시에 이미 우리 가운데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주님께서 가까우시기 때문에 6절은 '아무것도 염려하고 있지 말라 다만 모든 것 안에 그 기도와 그 간구를 감사들과 함께 여러분의 요구들을 하나님께 알아지게 하고 있으라'고 명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한글번역판들은 거의 모두 '아뢰라'고 되어 있고 영어에도 'let your requests be made known to God'으로 많이 번역했다. 그런데 이 '알아지다 (중간/수동태)'의 주체는 '요구들'로 생각되지만 원어에는 단수로 되어 있는데, 문장에 단수는 하나님 아니면 '기도와 간구'를 각 단수로 생각할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것' 정도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의 필요나 요구들을 우리가 기도하기 전에도 이미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고, 그렇다면 바로 '모든 것'을 기도와 간구를 통해 알게 하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에 시시콜콜 일일이 다 기도하며 간구하는 것은 무언가 기도 응답을 받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식구' 즉 밥을 함께 먹는 사람들은 밥상머리에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하는 사람들인데,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것이 많이 사라졌기 때문에 하나님께 이렇게 모든 것에 대해 알게 하는 것 즉 나누는 것 역시 이해가 힘들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7절 '그리고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그 하나님의 그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들과 생각들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다.

주님, 사역에 대해 얼마나 숫자적인 성취와 달성을 우리는 추구하는지요. 하지만 주님께서는 각 사람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고 또 함께 먹고 함께 얘기하셨음을 봅니다. 한 사람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며 배려하는 우리 성도들 되게 하소서. 가까우신 주님을 의지하며 감사함으로 주께 아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