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와 헌신 (레 2장)

1장에서는 짐승을 잡아 드리는 제사법을 기록했는데 2장은 소제 즉 곡물로 드리는 제사법을 기록한다. '소제'라는 말은 '변변치 못한 제사 혹은 기독교에서 곡식을 제물로 드리는 제사' 라고 사전은 정의한다. 제물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서,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는 것은 기본적으로 속죄를 위함이다. 하지만 곡물 제사는 속죄를 위함이 아닌데, 이것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 볼 수 있다. 가인도 그 소산의 첫 것을 드렸지만 거기에는 피흘림이 없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받지 않으셨다. 소제는 우리의 헌신을 의미하는데, 헌신 이전에 속죄가 요구된다. 우리가 아무리 헌신을 하고 싶어도 먼저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거나 주님과의 관계가 제대로 서지 않았다면 헌신은 무의미하다.

1절은 '고운 가루'를 말하는데, 당시에는 주로 밀을 재배해서 빵을 만들어 먹었기 때문에 '쌀' 같은 곡식 그대로 가져오지 않고 밀을 잘 갈아서 '고운 가루'로 준비해 왔다. 이것은 꽤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밀을 재배하고 추수하고 껍질을 까고 곱게 갈아야 한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 고집이 꺾이고 고운 가루 처럼 성품이 변화 되어야 함을 말하는데, 우리 인격에 그러한 곱게 갈림이 없이는 주 앞에 자신을 드릴 수 없다. 종종 우리는 '내 모습 이대로 주 받으옵소서' 라고 기도하거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있는 (able) 사람이 아니라 쓰임 받을 수 있게 내어드린 자 (available)를 사용하신다' 라는 말들을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선 우리 있는 그대로를 받으시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려면 먼저 우리는 준비되어야 하며 온전히 갈려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하면서 계속 갈리게 되는데, 사실 우리의 천연적인 모습이 갈리는 것 혹은 빻여지는 것을 통과하는 것 역시 사역이다. 하나님의 일은 나 자신이나 그 외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 즉 그 분을 계속해서 인식하고 의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운 가루'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 라고 되어 있는데, 기름은 붓고 유향은 놓는다. 기름이 부어지면 흘러 내리기 때문에 담는 그릇이 필요한데, 소제의 양은 명시되어 있지 않지만, 얼마를 드리던 간에 기름이 부어져야 하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아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그냥 자루째로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규모있는 그릇에 정갈하게 놓아야 하며, 이러한 것은 노력과 정성이 요구된다.  '한 움큼'을 제외하고는 제사장들에게 돌리는데, 제사장들은 이를 가지고 빵을 만들어 먹었을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무리 갈리고 곱게 빻아졌어도 우리 천연적인 성분만 가지고는 제물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기름이 부어져야 하며 또한 우리 위에 유향이 놓여져야 한다. 하나님 앞에 온전히 태워져서 그 앞에 향기로운 냄새, 받으실 만한 제물, 지극히 거룩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기름 즉 성령께서 부어지셔야 한다. 거룩하신 영은 우리 또한 거룩하게 하신다. 유향은 향을 내는 성분인데, 밀이 갈려서 고운 상태의 가루가 되고 거기에 기름이 부어지는 것은 귀한 것이지만 그것으로만 끝나면 주위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유향은 태워지면서 사방에 향기를 뿜어내는데, 이렇게 준비된 헌신은 주위에 증거가 된다. 고후 2:14에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기록하고 16절에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를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3절에 '화제물 중에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고 말하는데, 앞서 번제도 모두 불로 드리지만 이 소제물이 더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속죄는 필요하지만 속죄 자체가 하나님이 원래 뜻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인데,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한 것이지, 속죄만으로 끝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롬 3:23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기록하는데, 죄를 범했기에 속죄가 필요하지만 정작 원래 인간이 창조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것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4절 이하는 고운 가루가 아니라 아예 빵 자체를 드리는 예물에 대해 말하는데,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말한다. 앞서 제사장들이 받은 고운 가루로는 제사장들 마음대로 빵을 만들어 먹을 수 있지만 여기에는 누룩이 전혀 허락되지 않는데, 누룩을 쓰면 사실 먹기에는 더 편하다. 하지만 누룩은 부풀어 오르게 하기 때문에 얼마나 누룩을 썼는지에 따라 겉으로 보는 빵의 양이 달라진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무언가 드릴 때 누룩은 섞지 말아야 하는데, 우리의 본 모습 위에 이것 저것 혹은 거룩한 척 하는 등 우리 자신을 부풀어 오르게 하는 것은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  소금은 간을 맞추기 위함과 부패를 방지하기 위함인데, 달콤한 꿀은 배제되지만 짜게 하는 소금은 요구된다.

많은 경우 레위기 1장 번제는 완전히 다 태우기 때문에 '헌신'을, 그리고 2장 소제는 '교제'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속죄제'에 대해서는 4장에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죄제물도 제사장에게 돌리는 것 없이 대부분 태워지기 때문에 번제와 크게 다르지는 않다.  죄에는 소위 '원죄'와 '자범죄'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이 '원죄' 즉 죄가 시작한 것,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 대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해야 하는 것이 먼저다. 그렇지 않고는 '헌신'은 불가능하다. 1장과 2장은 모두 '향기로운 냄새'를 말하는데, 엡 5:2은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고 기록한다.  주님께서 인류를 대신해서 드려짐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기본적인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4장부터 나오는 속죄제는 2절 '범하였' 3절 '범한' 14절 '범한 죄를 깨달으면' 등 인간의 원천적인 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범죄한 것들 그리고 그에 대한 깨달음에 대한 속죄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는 말씀에 해당한다.

주님, 온전한 제물이 되어 바쳐질 때 주님과 우리 사이에 참 만족이 있음을 봅니다. 주께서 이미 우리의 죄를 온전히 해결하셨사오니 이제 믿음으로 주 앞에 온전히 헌신하기 원합니다. 성령이 부어지심으로 남은 것 없이 완전히 주 앞에 태워지기 원합니다. 주 예수님 부흥을 열어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