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죽었고 또한 이제 죽음에 넘기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 (레 16:1-10)

여호와께서는 '성소의 휘장 안 법궤 위 속죄소 앞에 아무 때나 들어오지 말라 그리하여 죽지 않도록 하라 이는 내가 구름 가운데에서 속죄소 위에 나타남이니라'고 2절에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과거에는 그 앞에 아무 때나 누구든 맘대로 설 수 없었다.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그것도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속죄제물과 번제물을 드리고 대제사장에게 맞는 의복으로 갖추어 입은 후에 들어갈 수 있다. 이러한 것이 없을 때는 죽게 되는데,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죽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신다. 원래 사람은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계속 생명을 얻고 풍성히 누리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에 죽음은 원래 하나님의 계획에 반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그 분을 통해 언제든 아버지께로 올 수 있고 은혜의 보좌로 나아갈 수 있다.

'아사셀'이라는 흥미로운 단어가 나오는데, 여기 레위기 16장에만 기록되고 그 외에는 아예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 이러한 제사는 특별해서 '일곱째 달 십일 (29절)' 에 즉 '일 년에 한 번 (34절)' 하는 것인데, 후에는 '아사셀'이 언급되지 않고 이 명령은 아론에게만 하신 것이기 때문에 과연 후에도 매년 이러한 아사셀에 대한 혹은 아사셀로서의 염소를 준비했을지 모르겠다. 개역개정은 26절을 '염소를 아사셀에게 보낸 자는'으로, 킹제임스흠정역은 '떠나보내는 제물인 염소를' 등으로 번역했다.원어로는 명사로만 기록되어서 '~으로서'로 번역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 하다.

'희생양'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바로 이 '아사셀'의 영번역 scapegoat를 재번역한 것으로 정확히는 양이 아니라 염소다. 이 말은 대를 위해서 죄를 뒤집어 쓰고 가는 모습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 되지만, 이미 여호와 앞에 속죄 제물로 염소 한마리가 드려졌다 (9절). 이제 10절은 이 아사셀 염소에 대해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것을 말한다.  광야는 보통 신앙 생활의 무대인 현 세상을 의미하는데, 신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음을 선포한다 (롬 6:8, 골 2:20, 딤후 2:11).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합한 혹은 연합한 것을 말하는데 (롬 6:3-5), 동시에 주와 함께 살았음도 말한다. 그리고 이제는 믿음 안에서 육체 가운데 산다고 (갈 2:20) 바울은 말한다. 이러한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세상이라는 광야에서 사는 것이지만, 목숨을 잃지 않았지만 나의 옛 자아를 죽음에 넘기는 혹은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 세상이라는 광야에 아직 육체 가운데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우리가 되게 하소서. 이를 위해 광야 가운데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삶이 있기를 원합니다.  세상 죄를 이미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이 계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