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말씀이 내게 생명되게 하는 공부법 (시 119:17-32)

17-24절까지는 Gimel, 그리고 25-32까지는 Daleth 구간이다.

시편기자는 119편 전체에 '시앜'이라는 말을 6번 사용하는데, 이 말이 전에는 '묵상'으로 번역됐었다. '묵상'이라는 말은 '마음을 비운다'라는 다소 불교적 개념이 연상되어서 아마도 이제는 '작은 소리로 읊조리다'라고 번역한 것 같은데, 불교에서는 마음을 계속 비우는 것에 집중하지만, 기독교나 유대교는 사실 마음은 심히 부패했고, 따라서 새로운 마음이 필요하며, 이 새로운 마음은 말씀으로 채워져야 함을 말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는 묵상은 '시앜'의 '사색하다, 불평하다, 중얼거리다, 말하다' 등을 의미한다. 결코 생각만이 아니라는 것인데, 따라서 우리가 아침에 하는 큐티는 단지 '조용한' 시간만이 되어서는 안된다. 입을 열어 주의 말씀을 읊조리고 하루를 살며 연거푸 중얼거리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것이 참으로 공부하는 것이고, 입을 열어 말할 때 마음과 연결되며 영과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소위 말씀을 '먹게' 된다 (요 6:57, 계 10:10).

이 gimel과 daleth 두 구간에 각각 '시앜'이 한번씩 나오는데, 17절은 '주의 말씀', 18절은 '주의 율법 (토라)', 19절과 21절은 '주의 계명들', 20절은 '주의 규례들', 22절은 '주의 교훈들 (혹은 증언들)', 23절은 '주의 율례들', 24절은 '주의 증거들' 즉 모두가 주의 말씀에 관계된 것이고 이들에 대해 23절은 '묵상' 혹은 '작은 소리로 읊조렸'음을 말한다. 특히 고관들 조차 자신을 비방할 때 맞대고 싸우거나 자신을 방어하는 태도를 갖기보다 단지 생명이신 주의 말씀을 읊조렸음을 밝힌다.

학생들이 공부를 할 때 그 공부가 평생 가지 못하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아마도 시험을 위한 공부 아닌 공부를 해서가 아닌가 한다. 정말 관심있는 것은 자신도 모르게 계속해서 생각하고 입을 열어 외운다. 이러한 것은 평생 잊지 않게 되는데, 마찬가지로 주의 말씀이 지식을 넘어 생명되게 하려면 그 방법은 바로 이 '시앜'을 해야 한다.

24절까지가 시편 기자의 일방적인 묵상을 기록한다면 25절부터는 주님과 관계 즉 양방성에 이루어지는 것들을 기록한다. 우리가 무조건 어디에 계시지도 모르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을 때에 우리를 받으시고, 부를 때에 응답하시며, 구할 때에 주시는 주님을 따른다. 그래서 주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하고 생각을 변화시키며 삶을 바꾼다.

32절은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라고 아뢰는데, 소위 우리의 사람됨 혹은 '그릇'을 넓혀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 또 자라면서 그 그릇의 크기가 달라지는데, 주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되어 우리 마음 혹은 사람됨까지 바꾸신다. 원어에는 '하시면'이라는 말은 없고 '당신의 명령들의 길로 나는 달려가리이다 이는 당신께서 나의 마음을 크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정도도 되어 있다. 여기에는 어느 것이 먼저인지 분명하지 않은데, 내가 달려가면 주께서 내 마음을 크게 하실 것인지, 아니면 주께서 내 마음을 크게 하실 것이기 때문에 (혹은 하셨기 때문에) 내가 달려갈 것인지 분명하지가 않다. 그 이유는 이 둘이 함께 가기 때문인데, 주님의 입장에서는 먼저 우리의 마음을 넓히신 것이고 이에 따라 우리가 그 은혜로 마음이 커진 것에 비해,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명령들의 길로 달려갈 때 마음이 커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주님, 참된 공부를 하게 하소서. 주의 말씀이 나에게 생명되고 나의 존재의 일부로 시작해서 나의 전부가 되게 하소서. 오늘도 주의 말씀 안에 풍성히 거하게 하소서. 내가 주께 달려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