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더 깊이 누림 (시 119:137-144)
원래 이과를 희망했지만 몇가지 이유로 문과를 택했기 때문에 대학시절 이과계통의 수업은 듣지 못했다. 친구들 중에는 특히 생물학을 전공해서 후에 의대를 가려던 학생들이 많았는데, 반드시 들어야 하는 과목중 일반 화학 후에 organic chemistry 그리고 그 후에 inorganic chemistry라는 것이 있었다. 다들 하는 얘기가 고등학교 때 들었던 화학 수업은 이 유기화학 그리고 다음 단계인 무기화학 수업에 가면 모두 거짓말 같이 느껴진다고 했다. 물론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오늘 말씀을 읽으면서 과연 시편 기자는 왜 이리도 계속 토라에 대해 규례와 계명 그리고 주의 말씀에 대해 연거푸 얘기하는지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우리는 많은 성경 구절을 알고 기독교의 기본 교리들을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정확히 그리고 깊이 아는 것들은 얼마나 될까.. 보통 큐티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깨닫고 적용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만, 큐티만을 통해 말씀 자체를 깊이 배우며 누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타종교의 경전과 같이 여긴다면 우리는 다만 율법이나 계명들을 알고 그대로 지키면 된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면서도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고 지켰지만 그 행위를 의지했던 것이 아니라 우선 그 말씀 자체를 귀히 여기고 높였다. 그래서 130절 후인 아직도 또 앞으로 계속해서도 주의 말씀과 토라와 진리를 높인다. 140절은 '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 라고 번역했는데, 무언가가 '순수'한 것을 알려면 경험해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단어 '짜라쁘'는 쇠를 단련할 때 쓰는 말로 '단련하다, 시험하다, 제련하다' 등을 의미한다. 제련하고 단련하고 시험을 거친 후에야 순수하게 되고 순수함을 발견한다. 주의 말씀은 그 자체가 순수하지만, 그 순수함은 나의 삶 속에서 시험을 거쳐 체험될 때 분명해진다. 주의 말씀은 진리이지만 유한한 인간이 이를 모두 깨닫고 경험했다고 자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실패만 더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시편 기자가 발견한 것은 자신이 '미천하여 멸시를 당하 (141)'고 '근심과 고통이 나를 붙잡았 (143)'다는 것이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주께서 명철을 주셔서 사는 것 즉 생명을 얻는 것이었다.
주님, 말씀을 더 깊이 배우고 누리기 원합니다. 지금 상태로 만족하지 말고 더 깊이 들어가게 하소서. 주의 말씀의 어떠하심을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