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은혜다 (시 123편)
이번 시편 역시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이지만 3-4절을 보면 현실은 너무도 힘든 상황에 있다. 그렇지만 시편 기자는 '내 눈을 들어 주께 향하'는데, 그 이유는 '은혜'를 위함이다. 이 '은혜, 카난'은 '은총을 베풀다, 잘 해주다'를 의미하는데, 그는 2절에서 한번 그리고 3절에서 두번 총 세번이나 구한다. 구원을 포함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은혜에 달렸다. 우리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엡 2:8).
속량 - 영과 혼의 구원 (시편 124편)
'속량' 혹은 영어로 redemption 이라는 말은 그리 이해가 쉽지 않은 말이다. 현대를 사는 이들은 노예 혹은 종이라는 신분을 그리 쉽게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출세'라고 말하면 더 쉽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성경에서 속량이라는 말은 출세의 의미와는 또 다른 것이, 종의 신분으로 묶여 있던 상태에서 값을 지불함으로 그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에 속량이라는 단어는 없지만 이를 연상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유명한 7절인데, 앞서 계속 '우리'라는 말 (원어에는 동사형에서 나타난다)을 하다가 4, 5, 7절에서 '혼' 즉 '네뻬쉬'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단어는 '생명, 목숨, 혼, 인격, 갈망, 열망' 등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사람 그 자체를 가리킨다. 그래서 인간의 실존을 말하기도 하고 숨이 붙어있는 생명체 혹은 창조물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문제는 이러한 혼으로서의 우리는 유한하며 죽을 수 있는 (mortal) 존재라는 것이다. 특히 실존면에서 과거 창세기 마귀 즉 오늘 말씀으로는 사냥꾼의 농간으로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되어 올무에 갇혔었는데, 그리스도께서 그 값을 자신의 죽으심으로 지불하셔서 우리가 올무에서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는 자들은 그 영이 다시 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이고 위에서 부터 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는 것이다. 하지만 그 영적인 새롭게 됨은 이제 현실에서 혼 가운데 드러나야 하는데, 믿음의 완성은 흥미롭게도 '혼의 구원'이라고 벧전 1:9는 기록한다. 궁극적으로는 우리의 몸이 새롭게 되어 부활할 것이지만, 이 땅에서 육체가운데 사는 중에 우리가 관심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 혼의 구원이다.
주님, 오늘도 은혜로 구원하소서. 주의 역사하심이 2천년이 지난 오늘에도 동일하게 영과 혼을 구원하시고 주를 닮아가는 이들을 지으소서. 주의 손에 붙들려서 이제 우리의 주인이 값을 지불하고 사셨음을, 속량하셨음을 인정하고 주를 따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