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 교회, 서머나 교회 (계 2:1-11)

에베소 교회

1절은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는 명령으로 시작하는데, '편지하라'의 시제는 아오리스트로 '편지하시오' 정도로 이해된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이시지만 그의 신실한 종들을 단지 '아랫사람'으로 보시지 않고 주님과 동일한 생명을 지닌 인격체로 존중하신다. 여기 '사자'는 '천사'와 동일한 '앙겔리온' 즉 영어로 angel이다. 흥미로운 것은 교회의 지도자인 '장로'나 '집사'에게 편지하라 하시지 않고 '사자'에게 편지하라고 명하시는 점인데, 이 '사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는 영적인 존재이기에 사람이 아니지만,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을 주님께서는 천사처럼 여기신다. 갈4:14는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라고 기록하는데, 갈라디아 전역에 위치했던 교회들은 바울을 천사 혹은 그리스도 처럼 영접했다.

이러한 개념 혹은 신앙은 이 에베소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 특별히 언급한 니골라당과 연결되어 있다. 교회 일이나 집회 인도는 특별한 계급이나 타이틀을 가진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고 성장한 사람이면 누구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지도자'를 '천사' 혹은 '사자'로 부르신다. 이 '사자'와 '7절부터 계속 나오는 모든 '이기는 자 (혹은 정복자)'는 모두 단수인데, 바로 신앙의 핵심을 잡고 주님 약속하신 것들을 취하는 이로서 이러한 사람이 바로 '사자'이며 '이기는 자'이다. 누구든 현재 신앙공동체를 위해 마음을 다하고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며 주의 왕국을 위하는 자는 이 '사자'이다.

에베소 교회에 계시된 주님의 모습은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인데, 에베소는 '처음'이라는 말이 많은 것 처럼 첫번째 즉 초대교회이지만, 그들 시대에 주님이 오시진 않으셨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 외에도 여섯 교회가 있으며 혹은 있을 것을 알고 인내해야 했다. 그래서 2-3절은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고 말씀하시는데, 이 '행위 (에르곤)'은 '일들' 복수로서 초대교회에는 정말 많은 사역들이 있었다. 이러한 사역들은 그들에게 '수고 (코포스, 고생)'를 가져왔고 또한 '인내'를 이루게 했다. 일들과 고생 없이는 인내도 없다.

그들은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했는데, 교회가 '은혜'라는 말을 오용하여 악한 자들과 그들의 악한 일들을 허용하면 안된다. 이러한 것 역시 고생과 인내를 요구하는데, 특별히 이 악한 자들 중에 '자칭 사도들'이 있었다. '사도'라는 것은 그 권위가 대단해서 아무나 그 권위에 도전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직분 혹은 위치지만, 에베소 교회는 그러한 것을 해내었다. 이것은 다시 '니골라당'과 연결된다. 이러한 신실한 태도는 다시 '참고,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혹은 낙심하지 않은)' 것으로 열매 맺는다. 그리고 이 모두는 '내 이름' 즉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위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렇게도 완벽하게 보인 에베소 교회에 책망할 것이 있는데,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것이다. 악한 자들을 대적하고 싸우고 여러 일들을 해내며 예수의 이름은 붙잡고 지키는 그들이 어떻게 '처음 사랑'을 버릴 수 있었을까? '책망'이라는 말은 '카타'로 '대적하다'를 의미하는데, 주의 몸된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 항상 사랑으로 보시지만 않고 '대적할만한' 것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이는 매우 심각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사랑'은 문자적으로 '너희들의 아가페, 그 처음 (프로토스)'인데, 이 '처음'이라는 말은 1장에도 '처음과 나중'으로 두번, 여기 2장에도 네번이나 나온다. 무엇이든 처음을 잃으면 문제가 되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5절에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고 말씀한다. 여기 이 '처음 행위' 역시 '프로토스'인데, 그렇게 보면 이 '아가페'와 '행위'가 연결된 것임을 볼 수 있다.

'처음'이라는 것은 시간적인 의미도 있고 공간적이나 가치적인 의미등 모든 것을 말한다. 에베소 교회는 역사적으로 첫째 교회는 아니었지만 바울이 기록한 에베소서에는 이 교회가 매우 영광스러운 교회였음을 볼 수 있다. 주님에게 있어 이 에베소 교회는 마치 둘째 태생이 더 위대해지는 것 처럼 아마도 영적으로는 첫째가 아니었나 한다. 그래서 처음으로 이 에베소 교회를 언급하신다. 영적인 성장은 시간에 국한받지 않는다. 몇십년 종교생활을 한다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영적 교만의 뼈가 굵어질 수 있다. 늦게 주님을 만나도 바울처럼 확실히 만나면 나중된 이로서 처음 될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경험했던 '아가페 그 처음'을 기억해야 하며 우리 삶 속에서 처음에 위치시켜야 한다.  여기에서 '행위'가 나오기 때문이다.

6절에는 '니골라당'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원어에는 '당'이라는 말은 없고 단지 '니골라들'이며, 15절 역시 같은 단어가 나오며 행 6:5 역시 같은 말이 있지만 여기와는 연관이 없는 사람 이름이다. 계시록은 많은 때 문자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 '니골라'라는 말은 '니코스 (이기는 자의 이기다 혹은 정복하다)'라는 말과 '라오스 (백성, 평민)'의 합성어이다. 즉 '평민을 정복하다'라는 말인데, 이것은 세상적으로는 백성을 압제하는 제국주의나 전체주의와 연결되지만, 여기는 '교회'를 말씀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이러한 특별한 몇몇 사람 특히 사제나 목회자들이 고집할 수 있는 교권주의를 말한다. 즉 특별한 교육이나 특별한 의식을 통과한 이들만이 특별한 집례를 할 수 있고 특별한 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주님께서는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고 말씀하신다. 사랑의 주님이 미워하시는 것들이 몇 있는데, 바로 이 니골라당이 그 중 하나다.

7절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는데, 지금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는 내용이지만, 초대교회 즉 이제는 더 이상 없어진 교회라고 해서 그 말씀의 내용이 우리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교회들' 즉 일곱 교회 모두에게 성령은 지금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면서 이 '귀 있는 자'와 '이기는 자 (혹은 정복자)'를 연결하는데, 성령께서 지금 하시는 말씀을 듣는 자는 이기는 자이며 그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을 것이다. 이기는 자로서 누릴 하나는 과거 죄를 지음으로 금지되었던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먹는 것이다.


서머나 교회

서머나 교회에게도 동일하게 편지하는데, 이 교회는 특히 고난의 교회다. '서머나'라는 말이 'myrr' 즉 죽은 이들의 몸에 바르는 '몰약'을 의미하듯 특별히 로마시대에 벌어진 끔직한 환난을 통과하는 교회다. 이러한 고난을 당하기에 주님께서는 채망하지 않으시고 다만 불쌍히 여기시며 소망을 주신다. 따라서 이 교회에 계시된 주님의 어떠하심은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시다. 환난을 통해 죽임을 당해도 살아날 것을 상기시킨다.

이 서머나 교회는 겉으로 보면 매우 힘들고 연약하며 고생하는 모습이지만 주님께서는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고 말씀한다. 모든 것을 소유하신 주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이다. 특히 이 교회는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비방'을 받았는데, 이제는 폐기된 과거 율법의 기능과 경륜을 들어 생명을 소유한 주님의 교회를 핍박한 것은 그들이 표면적 유대인임을 말한다 (롬 2:28). 종교적인 '정통성'이나 교권을 들어 다른 이들을 핍박하는 것은 주님께서 인정하지 않으신다. 이들을 오히려 사탄의 회당이라 부르신다. 우리는 소위 '이단 정죄'를 할 때 조심해야 한다. 다른 이들을 정죄하기에 앞서 우리들 먼저 회개하고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배우며 기꺼이 환란과 고생에 동참하는 제자되기를 힘써야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이 고난의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는 '내가 네 고난을 덜어주마'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장차 받을 고난'을 말씀하시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다. 더우기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고 말씀하고 특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고 말씀한다. 원어로는 킹제임스역 처럼 '죽기까지 신실하라'인데 즉 죽기까지 믿음을 잃지 말것을 명하신다. 이러한 말씀이 가능한 것은 이 땅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 부활의 삶이 더 영광스럽고 또한 영원하기 때문이다. 죽기까지 신실할 때 '생명의 관'을 받게 되는데, 역시 '생명'이다. 죽으면 그 아무것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11절은 이기는 자에 대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고 약속하시는데, 이 둘째 사망은 영적 사망으로 완전하고 영원한 사망 즉 주님과 완전히 끊겨서 불못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사망이다. 이러한 해를 받지 않으려면 단지 '믿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믿으려면 정말 믿어야 한다.

주님, 주님의 엄중하신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합니다. 얼마나 은혜라는 말로 가볍게 주님의 말씀을 대하고 있는지요.. 회개하며 다신 한번 이기는 자, 정복하고 있는 자로 서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