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리를 행사하는 참 자유인 (계 2:12-17)

버가모 교회이다. '버가모'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어원이 '푸르고스' 즉 '탑' '요새화된 구조물' 등을 의미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본문 내용과 잘 이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페르'와 '가모스'라는 단어들을 나누어 보면 꽤나 설득력 있는 해석이 된다. 그 이유는 '가모스'라는 말이 결혼을 의미하기 때문인데, '페르'는 '~관하여, 통하여'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중 결혼'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교회는 주님의 신부로서 주님과 결혼하고 주님만 남편으로 모셔야 하지만, 세상과 아직도 분리되지 않고 계속 짝을 지어 사는 상태가 바로 이 '버가모'이다. 에베소에서 서머나의 고난을 통과하여 교회는 아마도 지치고 번아웃 됐는지 모른다. 또 동시에 세상이 교회를 이제 종교적으로 용납하게 되었다. 로마는 처음에는 기독교와 기독교 진리를 핍박했지만 후에는 아예 국교로 삼았다. 교회가 세상과 결혼했다..

이러한 상태에 대해 주님의 모습은 '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지신 이가 (12절)' 되신다. 보통 '검'은 찌르는 것이고 '도'는 자르는 것이지만, 좌우에 날이 서있는 검인 경우 자를 수도 있는데, 이는 주님께서 교회를 세상과 분리하기 원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준다. 버가모 교회의 정체성은 교회임에 분명했고 그래서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사탄의 권좌'가 있는 큰 조직이 되어 버렸는데, 그 가운데 주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에서 죽임을 당'했다. '너희 가운데 곧 사탄이 사는 곳'이라는 말은 환경적으로나 혹은 조직적으로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생명이 중시되는 곳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교권주의적인 모습이 부각되는 모습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는 충성된 증인이 높임을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 이 '안디바'라는 이름이 의미심장한데, 많은 경우 역사적인 어떤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지만 이 이름의 의미는 '안티'라는 말과 '파스'라는 말의 합성어로 '모든 것을 대적하다'라는 의미이다. 교회가 더 이상 유기적인 그리스도의 몸이 아니라 종교로 타락할 때, 그리고 세상과 연합해서 이중적인 모습을 보일 때, 그러한 모습이 소위 '대세'가 될 때 믿는 이들 가운데 그 '대세' 곧 '모든 것을 대적하는' 이가 바로 참된 증인이다.

버가모에 위치한 교회 즉 참으로 믿는 이들은 이러한 증인의 죽음을 목도하며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책망하시는데, 이 '책망'은 앞 에베소와 마찬가지로 '카타' 즉 '대적하다'를 의미한다 (anti 보다는 약한 개념). 두가지를 말씀하시는데, 하나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시 '니골라들의 교훈을 따르는 이들이 있다'는 점이다. 사실 이 둘은 다른 것이지만 서로 연결되는데, '발람의 교훈'은 그 근원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 즉 우상과 하나되는 것이며 그 결과는 행음 즉 육체적이고 성적인 타락이다. 음행이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사람의 몸만이 아니라 정신을 잃게 하기 때문인데, 결과적으로 말씀을 받을 수 없게 한다. 즉 이것은 단지 육체적인 문제가 아니라 정신의 문제이며 결국 성령에 충만하게 하지 못하고 분별력을 잃게 한다. 그래서 왕이며 제사장으로서 부르심 받은 그 부르심에 따라 살지 못하고 단지 종교 생활에 의지하여 '니골라들의 교훈' 즉 현실적으로는 편리한 교권주의에 따르게 된다. 우리는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 (갈 5:13)'는데, 이 자유는 죄와 나의 자아와 마귀와 세상과 종교에 대한 자유다. 그 어느 하나라도 묶이게 되면 참으로 자유할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16절에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가서 내 입의 검으로 그들과 싸우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그 문제있는 이들에 대해 속히 가서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검으로 그들과 싸울 것을 말씀하시지만, 회개를 종용하는 대상은 버가모 교회이다. 이것은 문제있는 이들이 회개하도록 하는 책임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바로 '교회' 가운데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이들이라는 의미다. 즉 회개는 문제있는 이들이 먼저가 아니라 그들을 바로 이끌며 주님을 떠나게 하는 교훈을 대적해야 하는 성도들에게 먼저 요구된다.

17절도 동일하게 '교회들' 즉 이 버가모 교회 역시 역사적으로 사라진 교회로 볼 때, 지금도 주님의 말씀과 그 교훈은 오늘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역사적인 교회는 사라졌지만 그 모습은 아직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기는 자 (혹은 정복하는 자)에게 주는 상이 '감추었던 그 만나'와 '흰 돌'인데, 과거 구약의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에게 나타나고 모두가 먹은 것이었지만 이 '그 만나'는 이제까지 숨겨졌던 것이다. 구약의 만나는 먹었어도 죽었지만 (요 6:49), 이 '그 만나'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새로운 것이다. 또 이 '흰 돌'도 흥미로운데, '돌'이라는 말이 신약에 많이 나오지만, 이 '돌 (프세뽀스)'는 '작은 조약돌' 정도로 과거 대제사장이 가슴에 품었던 우림과 둠밈을 암시하는 듯 하다. 여기와 더불어 같은 단어가 행 26:10에만 나오는데 거기에는 '투표'로 번역되었다. 즉 이것은 돌을 던져 투표하는 혹은 우림과 둠밈 처럼 하나님의 뜻을 알고 행사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바로 이기는 자가 새로 오는 영원한 왕국에서 이러한 권리를 행사할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이러한 권리는 자유자에게만 주어진다.

주님, 참 자유자로서 우리를 부르셨음을 감사합니다. 진리를 온전히 알 때 우리가 자유할 것임을 믿습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연합해서 따르는 이들이 아니라 세상을 대적하며 주님의 왕국을 살 수 있는 참된 자유인들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