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자신을 구함 (계 2:18-29)

두아디라 교회부터 역사적으로 주님 재림 때까지 존재하는 교회 형태를 보여주는데, 25절은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내용을 보면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삼은 후 여러 이교도적인 요소들과 비밀스러운 것들이 교회로 침투한 사실들을 엿 볼 수 있다.

'두아디라'라는 말은 '희생' 혹은 '희생제물' 혹은 그 외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는데, 그 어원이나 유래를 찾기 쉽지 않다. '우상의 제물'이라는 말 처럼 여러 이교도적인 것들과 연관된 것, 그리고 소위 '마녀 사냥'이라는 것들이 두루 행해졌던 점 등이 연상된다. 18절은 이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계시된 주님의 모습을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교회에 여러 불순물이 들어오고 오염되었기 때문에 분별하시는 불꽃 같은 눈과, '빛난 (혹은 정제된) 주석' 즉 동을 정제하기 위해 여러번 불을 통과해야 하듯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오염으로부터 정결케 되기를 요구하시는 모습이다.

19절은 '내가 네 사업과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를 아노니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라고 개역개정역은 번역했는데 '사업'은 '행위'와 동일한 '에르곤'이다. (이러한 오역이 개역개정의 치명적인 문제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 에베소 교회에 대해서는 주님께서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와 (2절)' 그리고 3절 내용 등으로 칭찬하셨지만,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는 그내용이 훨씬 더 많은데 '네 행위와 사랑과 섬김과 믿음과 네 인내'가 있고, 또 '나중 행위가 처음 보다 더 많다 (혹은 더 크다)'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믿음'이 먼저고 '행위'는 그에 따르는 것이라 배웠지만, 주님께서는 에베소 교회는 물론 이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도 '행위'를 먼저 말씀하신 것 뿐만 아니라 역시 '행위'로 마치신다. 믿음은 행위와 항상 함께 가기 때문이다.

이 두아디라 교회를 로마 카톨릭으로 이해하면 19절의 칭찬은 의아한게 들릴 수 있는데, 이제는 교리적으로 성경적 진리와는 빗나간 것들이 많지만 초기 기독교의 기본 핵심 교리를 세웠고,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유일했던 기독교 교회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물론 그 이전에도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콥트 교회나 네스토리안 등 여러 형태의 교회들과 순수한 믿음을 추구했던 알지 못하는 많은 이들이 공존했었지만). 그래서 어떤 모양이든 그 '행위들 (원어 복수)'은 적지 않았고 또한 그 아가페 사랑은 물론 믿음이며 인내 또한 주님께서 인정하신다. (그렇기에 개인적으로 천주교에도 구원이 분명 있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천주교에는 이렇게 일반적인 기독교의 모습이 있는 반면 또 한면으로는 '사탄의 깊음들 (24절)'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크면 클수록 거기에는 사탄의 더 깊은 것들이 끼어들고, 반대로 죄가 충만한 곳에 더욱 은혜도 넘친다. 그래서 분별의 영이 필요하다.

이러한 점에 대해 주님께서는 책망하시는데, 먼저 ' 자칭 선지자라 하는 여자 이세벨을 네가 용납함이니 그가 내 종들을 가르쳐 꾀어 행음하게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는도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 이세벨은 구약의 인물이지만 이제 '교회'라고 하는 것 안에 꽤나 큰 세력으로 나타난 어떤 것인데, 그에게 '자칭 선지자'라는 권위가 있어서 가르치고 꾀고, 결론적으로 행음하게 하며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한다. 과거 천주교는 이교도들을 물리치고 성경을 간수했지만, 그 세력이 커지면서 이교도들과 혼합하고 결론적으로 교리도 혼잡하게 변해버렸다. 이 이세벨은 교회 내의 영향력있는 존재 혹은 조직이지만,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 이렇게 배교한 소위 '리더십'들이나 조직 혹은 시스템에 대해 '용납'할 수도 혹은 대적할 수도 있는 권위가 있다 (20절).

주님의 은혜는 이러한 이세벨이라는 막강한 세력에 대해 '회개할 기회를 주었'지만 그녀는 회개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주님께서는 그녀를 '침상에 던질 터'인데, 이 '침상'은 '클리네이'라는 말로 '우리말성경' 처럼 '병상'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그 세력이 약화될 것을 말씀하는데,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22)' 또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실 것이다 (23절). 역사적으로 정치력을 갈망하고 또 과시하며 여러 정세에 간섭하려 했던 로마 카톨릭은 그 세력이 막강했던 때도 있었지만 과거 그 화려한 세력에 비해 어느 순간 그가 권세를 부리던 여러 국가들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때에 또한 그러할 것으로 본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 그리고 '그녀의 자녀들'을 언급하는 것인데, '그녀와 함께 간음하는 자들'은 여러 열강은 물론 교리적으로 배교하는 '교회'들을 말하며 이들은 '큰 화난 가운데에 던'져지고 (22절), 특히 '그녀의 자녀들'은 역사적으로 나타난 로마 카톨릭의 모습은 물론이고 종교개혁을 했다고는 하지만 모든 면에서 로마 카톨릭을 그대로 답습하는 여러 기독교 교파들의 모습들과 연결되며 이들은 죽임을 당하는데 (23절) 그 존재가 피폐해지거나 사라지는 것은 물론이지만, 영적인 죽임 즉 사망을 의미할 것이다. 이러한 심판은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이나 사이즈가 아니라 주님께서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이심을 보여준다.

24절의 '남아 있어' 혹은 '남은 자들'은 '그 외의 사람들' 이라는 의미도 있는데, 두아디라라는 존재 속에 '이 교훈을 받지 아니'한 이들은 바로 그 외의 사람들이고 이들은 주님과 참으로 교제하는 이들로서 '사탄의 깊음들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 '알다'는 '기노스코'로서 남녀의 성관계를 말할 때도 쓰는 단어로 깊은 교제를 의미하기 때문에 이 두아디라 '교회' 내에서는 이렇게 사탄의 깊음을 알게 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로마 카톨릭에는 이렇게 '비밀스러운' 것들이 적지 않게 존재한다. 하지만 이러한 것을 모르는 평범한 성도들은 '다른 짐'들로 부터는 해방되는데, 이 '짐'은 문자적으로 '무게'를 의미한다. '사탄의 깊음들'을 아는 것을 매우 흥미로운 일일 수 있지만 그것은 짐이고 '무게'다. 우리는 '사탄의 깊음들'이 아니라 우리의 짐을 덜어주시는 '주님'을 알아야 한다.

25절은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고 명하시는데, 이것은 정제된 신앙의 핵심을 의미하며 많은 것을 소유한다해도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은 오직 '너희가 소유한 것'임을 말씀한다. 이 '것'은 정관사 단수로서 오직 '하나'를 의미하는데, 그러한 것을 주님 오시기까지 굳게 잡아야 한다.

로마 카톨릭 안에서는 믿음을 지키기 쉽지 않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약속 역시 작지 않은데, 26절은 '이기는 자와 끝까지 내 일을 지키는 그에게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리니' 라고 말씀한다. '내 일'은 '내 행위'로 주께서 인정하시는 우리의 '행위'는 주님의 그것과 같아야 하며, 동시에 주님 안에서 우리의 행위는 주님의 행위가 됨을 말씀한다. 그럴 때 이기는 자는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얻게 되는데, 27절은 그러한 권세가 '철장을 가지고 그들을 다스려 질그릇 깨뜨리는 것과 같'을 것을 말씀한다. 소위 '철권정치'인데, 세상 정치력을 탐하려는 로마 카톨릭의 어떠함을 이기는 자는 바로 진정한 정권을 얻을 것을 말씀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다스리다 (포이마이노)'라는 말은 동시에 '목양하다'라는 의미를 포함하는데, 그래서 '나도 내 아버지께 받은 것이 그러하니라'고 말씀한다. 28절은 '내가 또 그에게 새벽 별을 주리라'고 말씀하는데, 이 '새벽 별' 앞에는 정관사가 붙어서 '그 새벽 별'이고 이는 주님 자신을 가리킨다 (계 22:16). 로마 카톨릭에는 많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그 안에 교회로서 정체성은 주님께서 아끼시며 사랑하심을 본다. 그 안의 이세벨의 교훈을 따르면 안되겠지만 그렇게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기는 이들은 주님 자신을 소유하게 된다. 주님의 행위, 주님의 권세, 그리고 주님 자신을 얻는 것이 바로 이기는 자들이 누릴 것이다.

주님, 로마카톨릭에 있지 않다고 안전한 것은 아님을 압니다. 우리 역시 '그 자녀들'에 속한 종교적인 교회에 속해 있을 때 이기는 자가 되지 쉽지 않음을 봅니다. 오늘도 주님 자신을 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