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정말 받은 것들 (계 3:1-6)

6절로 비교적 짧은 사데 교회에 대한 말씀이다. '사데'라는 이름은 '남은 자'라고 하는데 분명하지는 않다. 이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 당신을 계시하신 모습은 에베소 교회와 비슷해서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지신 이'다. 에베소 교회에는 언급하지 않은 '일곱 영들'을 말씀하시는데, 5:6은 '내가 또 보니 보좌와 네 생물과 장로들 사이에 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 그에게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기록하며 이 일곱 영들의 정체가 주님의 눈이고 그 눈들은 온 땅에 보내심을 받았다. 눈은 보는 것이고 이 일곱이 온 땅에 보내졌다는 것은 바로 이 사데 교회가 어떤 형태로든 온 땅에 존재하게 된다는 의미로 본다.

이 사데 교회는 로마 카톨릭으로부터 분리되어 개혁한 교회인데, 어쩌면 종교개혁 이전부터 존재하던 교회다. 종교개혁을 시작으로 개혁을 불을 밝혀왔는데, 문제는 이러한 시도와 그 근본 이념이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특히 로마카톨릭의 혼합된 더러운 것을 대적해서 깨끗한 교리를 추구했고, 소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등을 외쳤지만, 이미 아성을 구축한 로마카톨릭을 대적하려니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오직 은혜'나 '오직 믿음'이 오용되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다시 '네 행위를 아노니'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네 믿음을 안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다시 '네 행위를 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에는 이유가 있는데,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라고 설명하신다. 즉 유명무실, 명목상의 교회라는 것이다...

로마카톨릭이 세상과 결혼하고 많이 타협한 것 같지만 개신교 역시 만만치 않은데, 정말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할 수 없는 혹은 할 필요 없는 것들을 교회 사업의 명목으로 너무 많이들 해왔다. 즉 분별없이 잠자고 있던 것인데, 그래서 2절은 먼저 '깨어라 (혹은 보아라)'고 명하신다. 소위 교회 '부흥'이 정말 부흥인지 다시 볼 필요가 있다. 혹시 교회가 연애당이 되지는 않았는지, 공연장으로 전락하지 않았는지, 성직자만 먹여 살리는 종교 집단이 되지 않았는지, 개혁이라는 말은 난무하지만 현실에서는 하나도 개혁의 열매가 없지는 않은지 돌아 보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그 남은 바 죽게 된 것을 굳건하게'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는 '내 하나님 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였'다고 매우 매서운 평을 하신다.

처음 개혁 당시 그 막강해 보이던 로마 카톨릭에 대해서는 잘했었지만, 그것이 계속 이어지지 않고 로마 카톨릭과는 무늬만 다른 또다른 '성직자 계급'을 양산해서 니골라당의 어떠함에서 해방되지 못했다. 그래서 3절은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하라 만일 일깨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 같이 이르리니 어느 때에 네게 이를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즉 개혁의 처음 정신을 잃어버리면 아무리 재림을 외쳐도 (사실 이제는 많은 교회에서 더 이상 재림에 대해 별 말을 하지 않지만) 주님의 재림은 도둑 같이 임한다.

다행히도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말씀하시는데, 뒤집어 보면 사데 교회 대부분 사람들은 '그 옷을 더럽'혔다는 말이 된다. 왜 개신교는 '그 옷을 더럽'혔을까? 이것은 다시 '행위' 문제인데, 종교 생활은 열심히 하지만 주일 사는 삶과 주중 삶이 다르기 때문이다. 18절에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흰 옷을 사서'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흰 옷'은 대가를 지불함으로 사야 하는 것을 말씀한다. 사데 교회 초기에는 순교도 하고 많은 환란이 있었지만 신교가 세력을 막강히 키운 뒤로는 오히려 카톨릭 세력을 능가하는 동시에 맘대로 교파들이 나뉘어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한 대가를 지불하기 보다는 자신의 몸에 맞는 옷들을 골라 입고, 다른 옷을 입은 교파에 대해 적대시 하며, 동일한 성경으로부터 온 타교파들의 교리와 진리를 모함했다 (예를 들어 칼빈주의 대 알미니안주의, 혹은 구원은 영원한가 아니면 잃을 수 있는가 등).

4절은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네게 있어 흰 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고 하는데, '몇 명'은 원어로 '몇 이름 (혹은 명성)'을 의미한다. 종교 개혁을 이끈 몇 명은 그들의 목숨을 걸고 개혁을 이루었지만 후에 그들의 교훈을 받은 이들은 그대로 따라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칼빈의 경우도 안수를 받지도 않았고 더우기 목사도 아니었지만 후세에는 '정통' 운운하며 안수받지 않으면 무시하고 이단시 하는 풍조까지 생기고 이것을 당연히 여긴다. 교회 내에서 섬기는 '리더들'은 필요하지만 '성직자들'은 필요하지 않다. 정말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켜 회개'할 때다.

이렇게 칭찬없이 죽은 자라는 평을 받은 사데 교회임에도 그들이 교회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일곱 영과 일곱 별'을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제는 그 가운데 '이기는 자'를 부르시는데, '이와 같이 흰 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결코 지우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흰 옷'은 다시 말해 '착한 행실'인데, 자선 사업 같은 것만을 말하지 않는다. 4절을 다시 보면 '나와 함께 다니리니'라는 말씀이 있는 것에 주의해야 하는데, 주님을 떠나서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 15:5).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 참된 '착한 행실'이고 '흰 옷'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기는 자'는 단수지만 3장의 '흰 옷'은 모두 복수 즉 '흰 옷들'이다. 이는 다시 '네 행위'의 '행위'가 복수인 것을 보며 이 둘은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계 7:13은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에 '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여기에서 '흰 옷'의 '옷'은 '스톨라'로서 '예복'을 의미하며 주님께서 마 21:11-12에서 말씀하신 내용이다. '흰 예복'은 혼인집 주인이 주는 것이지만, 그 예복을 '씻어 희게 하'는 것은 다시 말해 '행위'다. 이렇게 믿음과 행위는 함께 간다.

주님, 우리가 잃어 버린 참된 행위를 다시 한번 거슬러 올라 찾기 원합니다. 과거 믿음의 선진들이 목숨을 걸고 회복하며 지키려 했던 것들을 우리가 단지 편함을 운운하며 저버리지 않게 하소서. 믿는 이들로서 흰 옷들을 입기 원합니다. 주님의 은혜로 승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