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능력의 형제 사랑 (계 3:7-13)

책망없이 칭찬만 있는 빌라델비아교회다. 먼저 빌라델비아라는 말은 형제사랑이다. 교회 내에 모두가 형제이며 계급이 없고 그 안에 사랑의 교제가 있는 공동체이다. 이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 'philos'인데 이 말은 친구나 형제 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다. 이는 먼저 하나님과 이웃을 아가페 할 때 나타나는 결과물이다. '형제'의 헬라어는 '아델포'인데, '같은 자궁'이라는 의미로서, 종교조직의 '멤버들'이 아니라 주님 주신 동일한 '생명'으로 하나가 된 형제들이다. 성숙도에서는 차이가 있고, 형제로서의 서열은 존재할 수 있지만 계급은 없다.

흥미로운 것은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라고 말씀하시는데, 이러한 말씀은 신약에는 없지만 사 22:22 '내가 또 다윗의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두리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겠고 닫으면 열 자가 없으리라'는 구절을 찾을 수 있다. 이사야 그 전 20절은 '힐기야의 아들 내 종 엘리아김' 그리고 21절은 '정권'을 23절은 '영화로운 왕좌' 24절은 '모든 영광' 등을 말씀하는데, 이 '다윗의 열쇠'는 과거 여호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정권과 왕좌 그리고 영광과 관련있다.

'형제 사랑'을 하는 그들에게 '왕좌'를 말씀하시는 건데, 지난 2:26 두아디라 교회 이기는 자에 대해 말씀하시며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을 약속하시지만, 이 '다스리다'는 '목양하다'와 같은 단어에 비해, 이 빌라델피아 교회에 대해서는 어떠한 정치적 권력을 언급하시지는 않지만 결국 '다윗의 열쇠'는 '정권'을 암시하며 이는 '영원한' 즉 하나님의 정사를 의미한다. 이 '열쇠'는 열고 닫는 도구인데 8절은 특히 '열린 문'을 말씀하며, 이와 비슷한 말은 골 4:3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 주사' 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 빌라델피아 교회는 열린 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교회다. 구약에도 이런 비슷한 말씀은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에서 찾을 수 있는데, 이 열린 '하늘 문'을 통해 복을 부으신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 이 '열린 문'은 '양의 문'되신 그리스도시다. 헬라어로 이 '문'은 'thura'인데, 영어 through와 비슷한다. 즉 '통하는' 것이다. 이 문을 '통해' 즉 '들어오며 나오며 (요 10:9, 원어참조)' 우리는 복을 받고 누리며 또한 전한다.

주님께서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어떠한 모습인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시는데, 첫째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작은 능력을 가지고서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에도 역시 '행위'를 말씀하며, 특히 '작은 능력'을 언급하시는데, 따라서 빌라델비아교회는 대형교회가 아니다. 대형교회가 되면 이제 더 이상 빌라델비아 교회가 될 수 없다. 더 이상 능력이 작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능력이 작았음에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고 주의 이름을 부인하지 않았다. 능력이 커지면 주님 보다는 그 능력을 의지하기 쉬운데,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님의 말씀을 지켰다. 이 말씀은 '나의 인내의 말씀'인데 (10절), '우리'의 인내가 아니라 주님의 인내다. 인내 또한 주님과 동행할 때 가능하다.

흥미로운 것은 다시 '사탄의 회당'을 말씀하시는데 이들이 '자칭 유대인'이라 하나 그렇지 아니하고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다. 유대인은 원래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이들인데, 이들은 메시야이신 주님을 부인하고 거역하며 죽였다. 유대인 혹은 이스라엘을 민족 혹은 혈연 공동체로 이해할 때가 많지만, 실은 언약 공동체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마 3:9에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자신들을 유대인 즉 하나님의 백성이라고는 말하지만 주님을 따르지 않는 이들에 대해 '거짓말 하는 자들'이라 폭로하신다. 주님께서는 이들 중 몇을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어 '그들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것이 흥미로운 것은 버가모나 사데교회는 세상과 벗한 교회라 세상에 드러난 교회들이고 뉴스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교회이다. 따라서 여러 정치 세력이나 경제를 거머쥐고 있는 세력들과 짝한 교회들이지만, 그러한 것이 전혀 없이 오직 주의 말씀을 지키고 형제를 사랑하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말세에 정치경제를 주무르는 유대인들 몇을 주어서 절하게 즉 문자적으로 '경배' 혹은 '예배'하게 (헬 프로스쿠네오) 할 것이라 약속하는 것이다.

'절' 혹은 '경배'는 오직 주님께 하는 것이지만 이 능력 작은 교회에 대해 세상 권력자들 중 몇이 '경배'하게 할 것이라는 말씀은 참된 주님의 교회는 주님과 동등함을 보여준다. 즉 이 말씀은 교회 안의 몇몇 '사람' 즉 리더들 등에게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권력층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를 하나님의 참된 교회로 인정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다시 말해 주님께서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뉴스 등을 통해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오직 빌라델비아 교회만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10절은 다소 두려운 말씀인데,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라고 하시며 이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할 것을 약속하신다. 즉 다른 교회들에 대해서는 '면하다'는 말씀이 없는데 이 빌라델비아 교회는 인내를 통과하므로 시험을 받을 필요가 없다. 그에 비해 주님 재림 때에 존속하는 버가모 사데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들은 이러한 시험의 때를 통과할 것을 암시한다.

11절은 '내가 속히 오고있다'라고 현재진행형으로 말씀하신다. 즉 현재 존재하는 이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는 재림하고 계심을 말씀한다. 그리고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시는데, 이 '가진 것'은 앞서 말한 '작은 능력'이다. 작지만 주님과 함께 하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인내하게 하고 선교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12절은 정말 놀라운 말씀인데,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한다. 기둥은 건물에서 결코 뺄 수 없는 구조물인데, 이 빌라델비아 교회가 바로 '내 하나님 성전의 기둥'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특히 이기는 자 '위 ep'에 '하나님의 이름... 나의 새 이름'을 기록하실 것을 말씀하는데, 세상 통치자나 타락한 종교 등은 자신을 일컬어 '천자' 혹은 불경스럽게도 자칭 하나님이라 칭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 (계 17:3)'로 자신을 두르지만,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 특히 이 빌라델비아 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기록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후에 이 이기는 자는 세상이 볼 때 하나님 같을 것이다!

주님, 빌라델비아 교회에 하신 말씀과 그 이기는 자에 대해 약속하신 그 말씀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그치고 진정 교회의 존재 이유와 그 핵심 그리고 형제 사랑을 우리로 추구하게 하소서. 오늘도 오고 계신 주님을 기다리는 신실한 주의 이기는 자들이 일어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