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하게 하는 지식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계 3:14-22)

책망만 받았다는 라오디게아 교회 차례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면을 본다. 우선 일곱 교회에 대해 명하시면서 처음에 언급되는 에베소 교회를 제외하고는 원어에 모두 kai 즉 '그리고'로 시작한다. 이렇게 '그리고'를 제대로 번역한 번역본은 영번역판들 조차 그리 많지 않은데, 한글 번역판들은 모두 이 부분을 간과했다. 이 kai가 중요한 것은 일곱 교회가 모두 서로 다른 지역의 다른 모습의 교회들이고 장단점이 있지만 모두 주님의 교회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그리고 (혹은 또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로 시작된다. 이 문제 많은 교회도 주님은 빠뜨리지 않으셨고, 특히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라고 말씀하시며 라오디게아 교회 역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주의 몸임을 밝히신다. 이 '라오디게아'라는 말은 'laos 백성'와 'dike 정의'의 합성어인데, 그래서 하나님의 기준과 말씀에 의해 정의가 서는 것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소위 '상식'에 의해 결정하는 교회다.

주님께서는 이 교회에 대해 자신을 '그 아멘, 그 증인, 그 신실한 그리고 참된, 그 하나님의 그 창조의 그 시작'이라고 말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마지막에 언급된 교회이기 때문에 기독교 역사를 아는 교회였고 그 축적한 지식 또한 풍성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은 바로 주님 자신이었는데,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위와 같이 계시하신다. 우리가 배우는 세계 역사나 기독교 역사는 매우 단편적이고 불완전한데, 따라서 그 가운데 주님께서 신실하게 이끌어 오시는 많은 면들을 놓치게 된다. 주님께서는 앞서 '시작과 마침'이라는 말씀을 하셨지만, 여기에는 단지 '그 시작'이라고만 하시는데, 그 '마침'은 이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맡기시고 기대하신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21절에서 이 교회의 이기는 자에 대해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말씀하시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마침'이다. '마지막'이 아니라 '마침' 즉 완성인데 1장 8절에서 '시작과 마침 (원어 참조)'에서 쓰인 telos라는 단어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지 않고 자신들이 배운 지식과 역사와 경험했던 것들에 따라 즉 '백성의 정의'에 따라 행했기 때문에 능력이 없었고, 따라서 주님께서는 다시 한번 '행위'를 말씀하시며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나는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하신다. 이 뜨겁거나 차다는 의미는 19절에서 찾을 수 있는데, '열심'의 어원이 '뜨겁다'이기 때문이고, '회개'는 냉철하게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미지근한' 것이 문제인데, 이 교회는 그 모든 행위의 기준이 주님이 아님을 폭로하시며 그 결과는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는 말씀이다.

모든 것에 대해 '예'와 '아니오'를 분명히 해야 하는, 즉 세상의 빛으로서 밝음과 어두움을 분별해야 하는 교회가 두리뭉실 기준을 흐리며 말씀에 분명히 기록된 진리를 상황이나 '흑백논리'의 부당성을 들어 '백성'들이 좋아하도록 미지근하게 만들어 버린다. 교회 안에 계급제도를 가져오는 '니골라들'도 문제지만, 너무 '회중적'인 교회가 되버리면 기준이 흔들린다. 그래서 교회에서 '다스리는 (혹은 섬기며 목양하는)' 이들은 장로들이 되어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역사를 통해 기독교 지식을 포함한 많은 지식을 축적하면서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17절)'라고 말한다. 사실 현재 여러 기독교 출판물과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것들은 우리로 마치 영적으로 부자같이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값을 지불하며 고난을 통해 나 자신과 연합한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라 얄팍한 피상적 지식, 내 밖에 있는 지식이다. 교회 내에 여러 프로그램들과 제자 훈련 등이 있지만,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거나 영적으로 부요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프로그램 수료증은 나 자신의 참된 영적 상태와 성숙함을 속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의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주님께서는 날선 검처럼 비판하시지 않고 '권하'신다 (18절)'. 이 '권하다 sumbouleou'라는 말은 '조언하다'라는 의미인데, 앞에 '함께 sun'이 있어서 일방적인 가르침이나 지시가 아니라 '함께 상의하다'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이 자신들의 참된 처지를 깨닫지 못하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주님께서는 신랄한 비판 대신에 '함께 상의해 보자꾸나' 라고 말씀하신다. 흥미로운 것은 '내게서 .. 사서'라고 말씀하시는 것인데 (원어에는 '사다'는 말이 한번 나옴), 이러한 '불로 연단한 금'이나 '흰 옷' 그리고 '안약' 등을 값을 지불하고 사야 하며, 그 구매처는 바로 주님 자신이라는 것이다. 여기 '내게서'는 'par emou' 즉 para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 단어는 '~로 부터, 함께'를 의미한다. 이것은 '교제'를 의미하는데, ek를 쓰지 않고 para를 쓴 것은 이러한 것들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주님과 함께 하며 시간을 보낼 때 가능하다는 의미다.

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여기의 '사랑'은 '아가페'가 아니라 'philos' 즉 친밀하고 현실적인 교제다. 이러한 친밀한 교제를 위해 '책망하여 징계하'신다. 그리고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말씀하시며 더우기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20절은 말씀한다. 주님께서는 지식이 풍부하다고 여기는 이 교만한 교회에 대해 '함께 먹는' 친밀한 교제 안으로 초청하신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하라'는 명령이 많은 것 같지만 사실 18절은 '권한다'라는 말씀이고 명령어는 원어로 단지 19절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그리고 20절 '보라'가 전부이다. 마지막 때를 사는 우리는 헛된 것에 열심일 때가 많다. 그리고 열심이 있다해도 회개와 함께 하지 않는다. 진정 라오디게아 교회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이 교회에 대해서도 주님께서는 이기는 자를 부르신다. 특히 '보좌 thronos (영어 throne의 어원)'를 말씀하시는데, 신약에 63번 나오는 이 단어는 왕국을 말하는 마태복음에서 5회에 기록된 것을 제외하고는 계시록에 48회 즉 대부분 이 책에 기록되었다. 주님을 떠난 지식을 의지하는 것을 버리고 대가를 지불함으로 진정 부요하게 될 때 우리는 그 보좌에 참예할 수 있다.

주님, 제 자신의 가련함을 압니다. 그럼에도 열심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안에서 정복하는 그러한 뜨거운 믿음을 허락하소서. 주님과의 깊은 교제 안으로 이끄소서. 개인적으로도 또 교회적으로도 두려움을 내려놓고 주 앞에 문을 열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