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환난을 통과하는 이들 (계 7:9-17)

궁금하다 왜 생명의 삶은 지난 십사만 사천과 이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동일하다고 설명하는지.. 이런 해설(?) 때문에 이단이 생기는 것 아닐까? 왜 이런 해설을 고집하는지 그 배경이 궁금하다. 분명히 앞서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 각 지파를 말하는 것이고 9절의 이 큰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와 방언에서' 나온 이들 즉 이방인들이라고 되어있다.

앞서 6:11에서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고 말씀하셨는데, 13절 역시 '흰 옷 (원어로 동일한 두루마기, 스톨라스)'을 말씀한다. 9절은 '이 일 후에'라고 하는데, 아마도 시간이 흘러 죽임당한 이들의 수가 찬 것으로 보인다. 6:11의 사람들과 7:9의 사람들이 동일할지는 모르지만 9절의 사람들은 6:11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장로 중 하나가 그들이 '그 큰 그 환난으로부터 나오고 있는 자들 (현재진행형)'이라고 설명하기 때문인데, 그들에 대해 15절의 약속이 있지만 16-17절의 내용은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혹은 지금 살고 있는지) 증언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환난'이라는 말이 지난 1:9, 2:9, 10, 22 (특히 여기는 큰 환난)에 나오고 이제 마지막으로 기록되는데, 1:9은 '예수의 환난'으로 되어 있고, 2:9-10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 서머나 교회이기에 지금과는 큰 상관이 없지만, 2:22은 '볼지어다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 또 그와 더불어 간음하는 자들도 만일 그의 행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큰 환난 가운데에 던지고' 라고 기록한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은 결과로 큰 환난을 통과하는 벌이 내려지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이러한 큰 환난 가운데 변화하는 이들이 있는데, 환난을 통해 회개하며 어린 양의 피에 그들의 옷을 씻는 이들이다.  옷을 씻는 것은 행위이며 회개는 행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6-17절은 '그들이 다시는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도 아니하리니 이는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라'고 기록하는데, 이는 역으로 말해 그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주리고 목마르며 상하고 눈물 흘린' 것임을 말해준다. 그들은 단지 이런 환난 고통만 당한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고 장로는 설명한다.

주님, 역사적으로 복음 때문에 수 없는 이들이 고난 받았지만 마지막 때 그 대 환난을 통과하는 이들이 있을 것임을 봅니다. 환난을 통과하는 중에도 낙심하지 않고 그들의 옷을 어린 양의 피에 씻는 이들을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