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십사만 사천 (계 14:1-13)

여기 십사만 사천은 7장의 십사만 사천과 같은 사람들일까? 많은 주석은 동일하다고 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들은 또 다른 십사만 사천으로 본다. 7장의 십사만 사천은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의 합이며 그들 이마에 인을 받는다. 하지만 14장의 십사만 사천에 대해 정관사가 없이 그냥 십사만 사천이라고 한다. 즉 7장과는 별개인 것이다. 물론 '또 다른 십사만 사천'이라고 하지는 않지만, 이들은 이마에 인침 받지 않고 단지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다 (1절). 위치적인 면에서도 7장의 십사만 사천은 땅에 있지만, 여기는 어린양이 계신 시온 산 즉 하늘에 있다. 특히 이들은 '땅에서 구속받은' 이들이다. 7장의 십사만 사천은 단지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선택받은 이들이지만, 여기 십사만 사천은 '여자들과 더불어 자신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 즉 동정(parthenoi)이다 (4절). 7장은 '하나님의 종들 (3절)'이지만 여기는 '어린 양' 즉 주님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며 '사람들 가운데 속량함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 양께 (대해) 첫 열매 (단수)'이다.

이들은 '첫 열매'로서 7장 이스라엘 지파들과는 다르다. 아마도 환난을 통과하기 전 성숙된 이들로서 먼저 휴거를 받은 이들 혹은 각 시대의 이기는 자들일 수 있다. 이 십사만 사천을 상징적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3절의 '24' 장로들 역시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동정' 역시 문자적으로 받아야 하는데, '영적 순결함'이라고 해석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들은 특별한 이들인데, 따라서 여러 이단들이 자신들만이 이 십사만 사천이라고 주장할 때 그들은 첫째로 남자들이어야 하고, 둘째 여자와 한번도 몸을 섞지 않은 이들이어야 한다. 자꾸 이 십사만 사천을 영해하려 하면 문제가 생긴다.

6절은 '영원한 복음'을 말하는데, 이것은 성경에 이미 기록된 복음과 다른 것이 아니다. '다른 복음은 없'기 때문이다 (갈 1:7). 갈 1:8은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기록한다. 우리가 받은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가 영원하다. 흥미로운 것은 이 '영원한 복음'은 화를 입기로 작정된 '땅에 거주하는 자들 곧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방언과 백성'을 대상으로 한다. 이 복음은 땅에 거하는 이들에게 심판의 말씀이며 또한 아직도 기회를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복음 자체가 그렇듯이 어느 한 구절로 요약할 수는 없는데, 많이들 요 3:16을 복음의 핵심으로 보지만 성경은 복음이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아무튼 이 영원한 복음을 가진 천사는 7절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의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고 외친다. 땅에 거하는 이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8절은 '또 다른 천사가 뒤따르며 말하고 있다 저 큰 도시 바벨론이 무너지다 무너지다 그녀가 모든 민족들로 하여금 자기의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즙을 마셔오게 하였기 때문이라 하더라 (원어 참조)'라고 한다. 즉 이 바벨론은 계시록에서 갑자기 등장한 말인데, 과거 고대 바벨론은 이미 사라졌지만, 이 비밀스러운 도시는 계속 존재해 왔고, 모든 민족으로 진노의 음행의 포도주 잔을 마셔오게 한 (완료형) 존재다. 보통 '무너졌도다'라고 과거형으로 번역한 것은 아오리스트 직설법이기 때문이지만, 앞으로도 7번 언급되며 18:2에도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가 다시 한번 되풀이 되기 때문에 이것은 완료 즉 과거라기 보다는 바벨론의 멸망을 예언한 것이 된다. 그래서 '무너지다 무너지다'라고 개인적으로 번역했다.

9-11절은 세번째 천사가 하는 말인데,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에게 경종을 울린다. 성경(원어)에는 '오직 믿음'이라는 말은 없다. 우리는 '믿음' 자체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받으며 그것은 믿음을 통해서이다. 하지만 믿음은 단지 동의나 '깨달음'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또한 이 '자발적인' 행동은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가능하다. 만일 '오직 믿음'을 잘못 이해해서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 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게 되고 '누구든지 밤낮 쉼을 얻지 못'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단지 표를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표를 받는 행위에 선행되는 것이 바로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표를 받지 않으면 매매를 할 수 없기 때문에생활 자체가 매우 어렵게 되는 것을 넘어 목숨을 위협받게 되는데, 그 전에 그 짐승과 그의 형상에게 경배할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12절은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그들은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고 기록하는데, 지난 13:10에도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고 기록했다. 믿음은 인내를 요구한다. 12절의 언급은 아직도 이 땅에 성도들이 남아있는 것을 암시하는 듯 하다. 이것은 13절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라는 문구가 더욱 분명하게 뒷받침해 주는데, 원어로는 '이제부터 그 주 안에서 죽고 있는 그 죽은 (자들)은 행복하다' 정도로 되어 있어서 이들은 13-14장 환난을 통과하며 죽고 있는 자들이다.

주님, 이러한 십사만 사천을 따로 세우심을 감사합니다. 믿음의 신비를 더 살 수 있도록 주의 복음을 다시 묵상하게 하소서. 환난을 통과하기 전에 십자가를 지며 자아를 죽음에 넘기는 연습을 함으로 주님의 길로 인도함 받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