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첫째 부활과 그 생명을 누리는 행복한 성도들 (계 20:1-6)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이미 불못에 던져졌지만 용 곧 옛 뱀 즉 사탄이며 마귀는 아직 불못에 던져지지 않았고 대신 어떤 천사가 '무저갱의 열쇠와 큰 쇠사슬을 그의 손에 가지고 하늘로부터 내려와서' 그 용을 잡는다. 용 즉 옛 뱀 혹은 마귀 사탄이 무섭고 권세있어 보일지라도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 한' 자로 사람들을 미혹함으로 사망으로 인도한다.  이름도 기록되지 않은 한 천사가 과거 천사장 미가엘도 함부로 하지 못했던 마귀를 간단히 제압하는데, 이것은 심판과 집행이 능력 보다는 권위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가끔 그리스도와 사탄 둘이 싸우는 그림을 보는데, 이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사탄 마귀는 하나님과 상대도 되지 않고, 하나님은 직접 그를 심판하거나 집행하지도 않으신다. 그러한 것은 만주의 주 만왕의 왕이 아니라, 그분 아래 종들이 하는 것이다.

이 용이 천년 '후에는 반드시 잠깐 놓이'는데, 짐승과 거짓 선지자가 이미 불못에 던져졌지만 이 용은 미혹하는 자, 거짓말의 아비며 속이는 자이기 때문에 천 년 후에도 만국을 미혹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무저갱에 결박되어 있는 천년 간은 그리스도의 종들이 직접 주님과 함께 다스리며 이 땅은 공의가 온전히 실행되고 물이 바다 덮음 같이 여호와의 말씀과 그 영광이 땅에 충만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4절에 '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고 기록하는데 이 보좌에 앉은 자들이 영적 존재인지 아니면 사람들인지 분명하지 않게 들린다. 원어를 보면 '내가 보다'라는 동사가 단지 한번 나오며 '보좌들'과 '혼들' 둘다 그 목적어로 되어 있다. 즉 이 보좌에 앉은 이들과 '예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혼들'이 동일한 것을 보여준다. 이들은 그러한 신앙을 통해 목 베임으로 보좌에 앉았다.

여러 한글 번역들에는 이 목 베인 혼들과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이들이 함께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원어에는 목 베인 혼들은 대격으로 '내가 보다'의 목적어로 되어 있지만,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그 표를 받지 않은 이들은 'hotines, those who' 주어 형태로 되어서 따로 나누어 진다. 즉 목 베인 혼들은 보좌에 앉아서 심판하는 이들이고, 짐승에게 경배하지 않고 표를 받지 않은 이들은 (다시)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을 다스리게 될 이들이다.

이러한 해석이 필요한 이유는 이 '목 베이다 pelekizo'라는 말이 계시록 여기에 단 한번 나오는 단어이며 시제는 완료 즉 과거를 말하는데, 이 pelekizo라는 말은 특히 문자적으로는 '도끼로 찍다'를 의미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주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한 모든 이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마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말씀에 의하면 가룟유다를 제외한 주님의 열두제자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음을 알 수 있고, 그 외 열두제자 처럼 주님을 온전히 따르며 순교하는 이들 역시 이러한 심판하는 권세를 받게 될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는 다르게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의 동사 '경배하다'와 '받다'의 시제는 아오리스트 직설법으로 되어 있다. 아오리스트 직설법은 보통 과거로 해석하지만 아닌 경우도 많다고 계속 나누었는데,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다스리니)'의 '살다'와 '왕노릇하다' 역시 동일한 아오리스트 직설법이기 때문이다. 만일 과거로 번역한다면 '살았다'와 '왕노릇 했다'가 되어 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이것이 아오리스트 시제인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계시록의 이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이들은 소위 대환난 기간 동안에 그렇게 하지 않은 이들로서 그 숫자가 기독교 전체 역사에 비하면 매우 적을 것 같다. 그렇게 되면 역사를 통해 주님을 신실하게 믿은 이들, 특히 달란트와 므나 비유 처럼 열심히 섬김으로 많이 남긴 이들에게 주어진 여러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실 것에 대한 약속이 사라지고 다만 이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만 오직 천년 동안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지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언급은 분명 앞으로 기술의 진보를 통해 이루어질 일들임에 분명한 동시에, 역사적으로 (아오리스트 시제) 그리스도를 배반하지 않고 오직 여러 역경을 거치며 주님을 열심히 섬김으로 열매를 낸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달란트의 비유나 므나의 비유가 단지 이익을 내는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말씀이 전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달란트는 금이며 이는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나타내고 남기는 것 역시 동일한 달란트이기 때문에 우리의 부나 타고난 능력이 더 커지는 것에 대한 비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더 커지는 것으로서, 이는 짐승의 표를 받지 않는 것과 연결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세상 사업처럼 할 수 없는데, 하나님의 일은 아버지와 그 보내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들은 다시 살게 되는데, 이것이 첫째 부활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미 휴거되어 하늘에서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참여한 이들 역시 살아있을텐데 왜 이들에 대해서는 첫째 부활이라 하지 않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은 이미 부활 생명으로 살아서 하늘 위에 있기 때문일 것인데, 후에는 새 예루살렘과 함께 내려온다 (21:2). 주님께서는 요 11:25-26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은 후에 부활을 경험할 것이지만, 사실은 믿을 때 즉시 주님의 영원하신 생명을 소유하며 죽지 않는다.

이렇게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은 6절이 '행복하고 거룩하다'로 시작하며 '그 첫째 그 부활 안에 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자들'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참여하다'는 현재진행형으로 되어 있는데, 해석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말씀을 읽는 이들이 현재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함을 누릴 수 있다는 것으로 들린다. 우리는 앞으로 어차피 죽을 사람들이 아니라 부활 생명 안에 영원을 이미 살고 있는 하나님의 행복하고 거룩한 성도들이다.

주님, 말씀의 비밀을 다 이해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다만 주님의 약속과 말씀은 모두 완벽하게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이루어지며 완성될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며 살아 있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