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택할 것 (계 22:1-11)

1절의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에서 '하나님'과 '어린 양' 모두 소유격에 단수인 '보좌'를 가리킨다. 즉 '하나님'과 '어린 양'은 하나임을 말한다. 그 보좌로부터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이 흘러 나오고 있다.

강은 길 가운데로 흘러 새 예루살렘 성 전체를 적실 것이다. 그런데 강 좌우에는 생명나무가 있는데, 강 좌우에 있으려면 적어도 둘 이상은 있어야 하지만 단수로 되어 있다. 특히 이 '나무'는 보통 잎사귀가 있고 열매가 맺히는 tree에 해당하는 단어인 dendron이 아니라 '막대기' 혹은 '십자가'를 말할 때 쓰는 xulon으로 되어 있다. 주님의 십자가는 아직 끝나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는 막대기 같은 곳으로부터 생명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 마치 구약의 아론의 싹난 지팡이를 연상하게 한다.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라는 부분의 원어는 '매달 그 열매를 내고 있는데 열두 열매들을 맺고 있다' 정도로 되어 있어서 '종류' 혹은 '가지'라는 말은 없다. 즉 달마다 각기 다른 열매를 맺는다기 보다는 매달 한 열매를 낸다는 의미다. 여기에 소위 '성령의 열매'를 대조하고 또 추가로 몇개 더 얹어서 설명하려고 한다면 아마도 틀린 해석이 될 것이다. 하나님은 아가페이시고 아가페이신 하나님은 오직 아가페를 내시며, 그 아가페에는 여러 방면이 있다. 마치 한 열매에 여러가지 맛이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다시 '만국 (혹은 민족들 ethno)'이라는 말이 나오며 이제 모든 것이 다 끝났는데도 이 '이방'을 의미하는 '민족들'이라는 사람들이 아직 있을 것이며, 그 생명 나무의 잎사귀들은 그들을 치료할 것을 말씀한다. 그들에게 치료가 필요한 것은 믿는 이들이 소유한 그 기업 즉 하나님의 그 풍성하시고 영원한 생명이 그들에게는 없기 때문일텐데, 그러한 사람들이 아직도 '민족들'로서 존재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은 사실 받기가 쉽지 않은데, 그래서 초기 성경이 구성될 때 요한 계시록을 포함해야 할지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계시록은 분명 복음서, 그것도 매우 특별한 복음서를 기록한 요한이 쓴 것이기 때문에 그가 영안에서 보고 그대로 기록한 이상, 말씀 그대로 받아야 한다. 하나님은 다시 말해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으시는 거룩하시고 은혜로운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변화받은 인간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4절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고 기록한다. 이 말씀으로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라고 기록한 고전 13:12 말씀이 이루어 진다. 또한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에 있다는 것은 각각 그 종들이 모두 하나님을 나타내며 대표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고 온전히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따라서 주님께서 맡아들 되시고 주님의 그 거룩하심을 온전히 닮아 믿는 우리들도 그때에는 아들들이 될 것이다.

5절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라는 말씀은 앞서 2절의 '만국'이 있어야 함을 설명하는데, '왕 노릇' 즉 원어로는 '다스리다'이며 다스리기 위해서는 그 대상이 필요한데 바로 이러한 만국을 세세토록 다스릴 것을 설명한다. 이제 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만국 역시 영생하는데, 그들의 영생은 하나님의 생명으로가 아니라 생명나무 잎사귀의 치료를 통해서이다. 따라서 이들은 온전히 성화된 이들과 확연히 다르다.

이렇게 놀랍고 두려운 말씀을 보인 천사에게 다시 요한이 절하려고 하자 천사는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말한다 (9절). 원어를 직역하면 '그러지 말라! 나는 그대와 그대의 형제들 그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씀들을 지키는 자들의 동역자 입니다. 하나님께 절하세요' 정도가 된다. '그러지 말라'의 시제는 현재진행형으로 자신에게 절하려는 요한을 급히 말리기 위한 것이라면, 천사 자신의 말대로 그는 요한이나 형제들 그리고 선지자들은 물론 말씀들을 지키는 모든 이들과 동일하게 일하는 동역자이다. 그래서 '절하세요'는 아오리스트 시제가 된다.

계속해서 '속히 되어질 일' 또 '속히 오고 있다' 또 10절의 '때가 가까우니라' 등의 말씀은 이미 2천년이 지난 현재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주님께서는 '속히'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2천년이나 기다리셨을까? 생각해 보면 이 역시 주님의 뜻 안에 있지만, 인간의 과오도 분명 있는데, 예를 들어 동방박사들이 하나님께 묻지 않고 먼저 헤롯궁으로 가서 주님의 태어나심을 물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많은 아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 처럼,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는 명령을 어겼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꽤나 오랜 기간 동안 성경은 덮혀 있었고 일반인들에게 봉인되어 있었다.

11절은 원어로 '불의한 자는 그대로 불의하게 두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게 두며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게 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둘지니라' 정도로 되어 있다. 여기 모두 '두고'라는 말이 있지만, '의로운 자'에 대해서는 '의를 행하게' 라고 되어 있다. 의는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행함으로 완성된다.
이 구절은 운명론적으로 들리는데, 마치 복음을 전할 필요도 없는 것 아닌가 할 정도의 느낌이다. 복음은 악인을 회개시켜서 의롭고 거룩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자녀되게 하는 생명의 말씀인데, 불의한 자나 더러운 자 등은 소망이 없다는 것 처럼 들린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증인으로서 살아야 하지만,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들은 물론이고 복음을 왜곡시키며 자기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이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능력이 먼저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것에 초점을 두어야 하며 그 안에 화평과 능력과 영광을 먼저 누려야 한다. 이러한 것이 없으면 다른 이들을 변화시킬 수도 없고 오히려 우리가 미혹되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우리가 이겨야 할 대상은 외부에도 있지만 그 목적과 초점은 싸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이 예언의 말씀들을 지키는 것, 즉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시록에서 계속 나오는 두 가지 큰 줄기, 즉 옛 뱀과 그에 속한 타락한 천사들과 짐승들과 거짓 선지자와 세상 등 모든 것들 그리고 반대로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와 생명나무 주님의 동역자 그리고 주의 백성들 등 모든 거룩한 것들은 바로 이 '불의'와 '더러움' 그리고 '의로움'과 '거룩함' 사이에 우리가 양자택일 할 것이다.

주님, 성도들이 온전히 거룩한 삶을 살며 의를 행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시고 계시록의 말씀을 오늘 열어 주시고 풀어 주소서. 주의 어떠하심 그 놀라우신 생명을 오늘 맛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