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이지는 않지만 핵심있는 영적인 기도 (엡 1:15-23)

보통 기도할 때 구체적으로 기도하라는 설교나 권유를 듣는다. 구체적인 내용이 이루어졌을 때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것을 알기 위함이고, 만일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을 더 찾아야 한다는 지극히 논리적인 이유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주장은 구약 엘리에셀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러 갈 때 매우 구체적으로 주께 구한 것을 그대로 받은 것에 기인한 것 같다. 물론 이러한 구체적인 기도가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그러한 기도에는 기본적으로 의심이 존재하며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기인한다. 약 1:6은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라는 구절처럼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는 기도는 하나마나이며, 우리는 우리의 원이나 우리의 뜻대로 기도할 수 없고, 아버지의 뜻대로, 주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구할 것을 구해야 하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는 분명한 전제가 요구된다.

바울은 기도와 말씀에 충만한 사람이었는데, 오늘 그가 에베소 교회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보면 지극히 영적이며 어쩌면 우리 일상 생활에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을 구하고 있다. 이것은 믿음의 핵심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알려주는데, '일상 생활'은 분명히 존재하고 육신을 가진 존재로서 무시할 수 없지만 믿는 이들에게 일상이나 몸 혹은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음을 알려준다.

15절은 '이것을 통하여'로 시작하는데 즉 앞의 모든 실재를 자신도 동일하게 받아 누리고 있음을 말한다.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는데 먼저는 그들에 대해 그치지 않고 '감사'한다고 말한다. 기도와 감사는 항상 같이 가는데, 상황이 힘들거나 탄식할 일이 있어도 그 가운데 감사할 것을 돌아보며 감사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 (16절).

17절부터 시작되는 그의 기도에서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것인데, 거의 모든 한글 번역이 하나님을 '알다' 즉 동사로 번역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물론 목적이지만 원어로는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로 되어 있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그 영광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시도록 (가정법, 기원하는 형식)' 정도로 되어 있다. 이것은 '지혜와 계시'에 앞서 '지식'이 먼저임을 보여주는데,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가 있기 때문이다. 지식이 없으면 지혜나 계시도 없다. 이 참된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 즉 주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유독 이 부분에 '지식, 지혜, 계시, 알다' 등 지식에 관계된 말이 많은데, 우리의 신앙은 무조건적인 것이 아니라 '앎'에 기초하며 앎을 통해 '경험'을 낳기 때문이다. 바울의 기도의 핵심은 성도들이 평안히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되는 것이었다.

18절은 '여러분의 마음의 눈들을 밝히셔서' 라고 되어 있는데, 요즘은 소위 '뉴에이지'에서 비슷한 말들을 하지만 그들은 과거 창세기에서 선악지식의 열매를 먹은 후에 옷을 벗은 상태 즉 부정적인 것에 대해 눈이 밝혀진 것 같은 그러한 밝혀짐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 눈들이 밝아지는 것은 그 목적과 결과가 '아는' 것인데 즉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들 안에 그의 유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또한 그의 힘의 강력의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들 안으로 (베푸신) 그의 능력의 넘치는 위대함이 어떠한지' 아는 것이다 (18-19절). 이러한 것은 어쩌면 뜬금없고 형태가 없으며 그 결과 역시 점검이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 신앙의 목적은 바로 이러한 데 있다.

특히 20절은 '그(힘)를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셨음으로 그를 죽은 (이들)로 부터 일으키셨고' 라고 되어 있는데, '그'는 여성격으로 앞의 여성격으로 되어 있는 '힘 ischus'을 가리킨다.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여 그를 죽은 자들 중에서 일으킨 바로 그 힘이 우리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힘은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을 뿐 아니라 하늘에 계신 그분의 오른편에도 앉히셨는데, 이는 그 동일한 힘이 후에는 우리를 일으키시고 또한 하늘에 놓으실 것을 말씀한다. 이러한 것을 '앎'으로 우리는 바로 현재 그러한 실재를 영 안에서 누릴 수 있다.

주님의 이름은 일컬어지는 모든 이들 보다 가장 높으신데, 이러한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머리가 되셨다고 한다 (22절). 그런데 하나님으로 시작해서,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그리고 유독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말하고 궁극적으로 이제 '그 교회'에 대해 '만물 안에서 그 만물을 충만하게 하고 있는 그 충만'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너무도 놀랍고 영광스러운 것인데, 과연 이러한 자각이나 '앎'이 우리에게 있을까? 우리는 사실 그리스도도 제대로 모르고, 하나님도 잘 알지 못하며, 따라서 교회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무엇을 달라는 것 보다 정말 이 '앎'을 놓고 기도해야 한다.

이 '알다'라는 말은 여러 곳에서 쓰인 '기노스코'가 아니라 여기에는 '에이도'로 되어 있다. 보통 '기노스코'가 히브리어 '야다' 즉 경험적으로 깊이 알다라는 의미라고 해석하지만, 이는 어떤 '배움'을 통해서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에 비해 '에이도'는 '눈으로 보아 알다'를 말한다. 즉 '기노스코'는 '배움'을 통한 것이지만 이것은 한면으로 '깨달음'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지식 안에서' 알게 (에이도, 깨닫게) 하시기를 기원했다. 따라서 바로 이 '에이도'야 말로 눈으로 직접 보고 깨달아 아는 것이고, 배움을 넘어 '마음 눈들이 밝혀지는' 것이다. 성경 구절을 많이 알고 외울 수 있을지라도 거기에 진정한 깨달음이 없으면 '그 힘의 능력'을 우리는 체험할 수 없고 또 쓸 수 없으며, 교회가 무엇인지도 알기 어렵다. 우리는 열심히 배우며 경험하는 것은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눈을 밝혀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의 마음 눈들을 열어 주소서. 이제까지 배운 지식이 주님 안에서 귀한 것임을 압니다. 그러한 지식 안에서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셔서 저로 깨닫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다시 깊이 알게 하소서. 우리는 많은 때에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 가운데에도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하심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심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