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부흥을 위해 현재 우리가 하는 기도 (엡 3:14-21)

지난 1장 17-19절의 내용이 에베소 성도들에 대한 바울의 기원이었다면 이번 구절은 바울이 하나님께 에베소 성도들을 위한 기도이다. 앞서 13절에 '환난'을 말하며 바울은 그가 겪고 있는 환난 혹은 고난은 오히려 영광임을 밝혔는데, 14절은 '이러므로 toutou'라고 시작한다. 바울은 고난을 받으면서 기도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다. 당시 기독교는 소위 '신흥종교'로 신도수가 많지도 않았고 그 세력은 미미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능력'과 '그 교회' 안에서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그 능력을 계속해서 증언하고 있는데, 그렇기에 고난을 당하는 지금도 14절은 '(내가) 나의 무릎들을 꿇고 있습니다' 즉 현재진행형으로 말하고 있다. '앞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거나 '언젠가' 기도합니다 (아오리스트 형태) 등으로 말하지 않고 지금 '무릎들을 꿇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고백에 아마도 이 구절을 읽던 이들 역시 함께 무릎을 꿇지 않았을까?

여기에 '기도하다' 혹은 '빌다' 등의 동사는 없고 단지 무릎을 '꿇다 kampto'라는 동사만 있는데, 바울은 다양한 자세로 기도했었겠지만, 특히 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기본 자세인데,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시며, '그로부터 하늘들 안과 땅 위 모든 족속이 일컬어'지는, 즉 지존자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 성도들을 위해 하는 기도는 1장 그의 기원과 크게 다르지 않다. 평안이나 건강 혹은 성공을 위해 무릎을 꿇지 않고,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주시기를, 그 속사람(을) 안에서 그분의 영을 통해 능력이 강하여 지도록 (하시기를),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들 안에 거하게 하시기를, (여러분이) 아가페 안에서 뿌리가 박혔고 터가 잡혔기를, 그래서 모든 성도들과 공동으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떤지를 깨닫는 것에 강하게 넘치기를, 그 지식의 초월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아가페를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 안으로 충만해 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16-19절).

하나님은 '후하게 주시'는데, '그분의 영광의 풍성함을 따라' 주신다. 그런데 그 목적은 '그 속사람(을) 안에서 그분의 영을 통해 능력이 강하여 지도록' 하심이다. 이 '속사람'은 '그 ton, the'가 붙은 단수이기 때문에 소위 개인적인 '내면'을 가리키는 동시에, 지난 '한 새 사람'인 '교회'를 가리킨다는 느낌을 받는다. 성도들이 추구하는 것은 내 개인적인 내면의 평안이나 믿음의 성장이나 부흥만이 아니라 바로 '그 한 새 사람'인 그리스도의 몸이신 교회, '그 속사람'에 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위해서는 각 사람의 마음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거하셔야' 하는데, 많은 이들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거하신다고 믿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우리 마음은 너무 자주 바뀌기 때문에 한번 마음을 열었다고 주님께서 우리 마음에 온전히 거하시지는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믿음을 통하여'가 필요한데, 특히 각자가 다른 마음들을 품고 있기 때문에 동일하신 그리스도께서 서로 다른 우리들 마음들 가운데 계시려면 정말이지 이 '믿음'은 필수다.

흥미로운 것은 대부분 동사는 아오리스트지만 '아가페 안에서 뿌리가 박혔고 터가 잡혔기를 (혹은 터가 잡혔습니다)'는 완료형이다. 적어도 에베소 교회는 이렇게 아가페 안에서 뿌리 박힌, 그리고 터가 잡힌 교회였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과 공동으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떤지를 깨닫는 것에 강하게 넘치기를, 그 지식의 초월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아가페를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 안으로 충만해 지기를' 바울은 간구할 수 있었는데, 많은 한글 번역본들은 '모든 성도와 함께'라고 번역했지만, 보통 '함께'는 meta라는 단어가 쓰이는데 비해 여기에서는 sun으로 되어 있다. 즉 '함께 사역하는 sun ergon'등에 쓰인 말로 지난 번에 '공동체'로 번역할 때 설명했었다. 즉 여기서도 '공동으로' 라고 번역하게 되는데, '함께'라는 말은 각 사람이 하나씩이라는 느낌이 들지만 '공동'이라는 말은 '전체가 하나로'를 연상하게 한다. 바울이 원하고 기도했던 것은 성도들 하나 하나가 서로를 이끌며 도와주는 것도 물론 있었지만, 교회 전체가 하나가 되어 함께 성장하며 부흥하는 것을 갈망했다. 그 이유는 바로 19절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 안으로 충만해 지기를'에서 찾을 수 있는데, 지난 1:23은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원어로 하면 '이(교회)는 그의 몸으로, 만물 안에서 그 만물을 충만하게 하고 있는 그 충만입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그 충만인 교회를 꿈꾸며 미리 보았다.

이 '충만'은 '성장'인 동시에 '부흥'인데, 이러한 것은 '모든 성도들과 공동으로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떤지를 깨닫는 것에 강하게 넘치기를, 그 지식의 초월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아가페를 아는 (18-19절)' 것이 요구된다. 여기서 '그'가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랑'이나 '그리스도' 등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모든 명사는 중성명사인데, 그리스도는 남성명사이며 사랑은 여성명사이다. 중성명사는 '풍성함'과 '충만' 이 둘인데, 그래서 이 둘로 이해하면 이러한 풍성함과 충만이 이미 우리에게 있지만 문제는 아직 '깨닫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더우기 단지 한번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 깨달음에 강하게 넘치는 exischusete 것이 필요했다.

이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라는 구절은 하나님의 그 풍성함과 충만이 단지 3차원 정도로 얘기하는 것 같이 들릴 수도 있지만, 19절은 '지식을 뛰어넘는 (개역개정은 18절에 '지식에 넘치는')'이라고, 또 20절은 '우리가 구하고 있거나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 보다 훨씬 더 넘치도록'이라고 말하며 하나님의 스케일은 인간의 이해와 지식과 깨달음을 훨씬 넘어서는 것을 밝힌다.

바울의 기도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끝맺지 않고 단지 '아멘'으로 끝나는데,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높이며 영광을 돌린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기도에 단지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라고만 하면 들어주실 것이라고 잘못 배웠지만, 기도는 오직 아버지의 뜻대로 구해야 응답 받는다. 이러한 기도가 바로 '예수님 이름 안에서' 하는, 즉 예수 그리스도의 그 인격 안에서, 주님께서 하셨던 기도처럼 하는 기도가 된다. 우리의 바람이나 계획과는 상관없이 오직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을 기원하는 것이다. 바울의 간절한 기도는 다른 구절에서 단지 '세대 속으로'라고 단지 한번 말했던 것과는 달리 여기에는 '영광이 세대들의 세대들의 모든 시대들 안으로' 라고 되어 있다.

주님, 바울의 간절함을 배우기 원합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새롭게 하소서. 주님의 참된 부흥을 보며 갈망하며 추구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