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은혜가 은혜로 주신 선물의 내용과 목적: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 (엡 4:7-16)
7절은 영번역들을 포함 거의 모든 번역본들이 '은혜를 주셨다'로 번역했는데, 원어에는 '은혜'가 목적어가 아닌 주어로 되어 있다. 더우기 정관사가 붙은 즉 '그 은혜가'로 되어있어서 '그런데 우리 각기 하나에게 그 은혜가 그리스도의 주심의 분량을 따라 주셨습니다' 정도가 된다. 만일 '은혜를' 주신 거라면 각자 받은 은혜가 다 다르게 되지만 우리는 동일한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각자 다르게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주심의 분량'이다.
그래서 8절부터 16절은 이 '우리 각기 하나에게' 즉 믿는 이들 각자가 받은 그 분량의 다름과 그 주신 궁극적 목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8절과 9절은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하심 그리고 승천하심을 구약 시 68:18을 인용하며 증명하는데, 주님께서 그렇게 올라가실 때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음에 주목한다. 흥미로운 것은 주님의 승천이 그분의 신성을 증명하는 것만이 목적이 아닌,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함 (10절)'을 말하는데, 하늘은 이미 주님의 임재와 영광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이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것은 이 땅이 그 주된 목적이 되는데, 이를 위해 11절은 '그분이 몇을 과연 사도들로, 그에 비해 몇을 대언자들로, 그에 비해 몇을 복음 전도자들로, 그에 비해 몇을 목자들과 교사들로 주셨습니다'라고 기록한다.
'주셨다'의 시제는 완료가 아니라 아오리스트 직설법인데, 만일 완료형이라면 더 이상 사도들도 대언자들이나 복음전도자들 그리고 목자겸 교사들은 더 이상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오리스트 시제인 것을 가만하면 지난 2천 여년 동안 계속해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몸된 교회에 위 열거한 선물들을 주셨고 지금도 주신다. 이 순서가 매우 중요한데, 앞서 '분량'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역과 섬김은 같지만 그 분량은 다르다. 만일 이 시대에 자신을 사도라고 칭하는 이가 있다면 분명 그의 사도됨의 진정성을 짚고 넘어가야 하는데, 사도의 권위는 매우 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언자들'도 다르지 않은데, 보통 '예언자' 혹은 '선지자'로 번역된 prophetas는 '미리, 앞서, 전에 앞에'를 의미하는 pros와 '말하다' phemi의 합성어이다. 그리서 '선지'라는 말은 '미리알다' 즉 seer에 더 맞는다. 대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사람 혹은 말해내는 즉 선포하는 사람이다. 사도들이 마련한 기초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말해내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이들은 그 수에 있어 그리 많지 않다.
'복음전도자들'이 따르는데, 사도들이 마련한 기초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대언자들의 선포에 입각하여 온전한 복음을 전달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사도들이나 대언자들 보다는 더 많은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각 직분에 대해 'de (그에 비해 혹은 어떤 사람은, 더러는 등등)'라는 말이 붙어 있는데, 마지막 '목사와 교사'라는 말은 이 둘 모두에 이 de가 적용되어서 '목사'와 '교사'를 따로 두지 않는다. 더우기 한글성경에만 유독 '목사'라고 번역되었지만 원어로는 '목자 poimen'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목자겸 교사들'로 번역되어야 한다. 목자들은 양들을 이끌고 먹이는 자들이며 이를 위해 위에 언급된 다른 직분들 보다 양들을 더욱 자세히 가르쳐야 한다. 더우기 약 3:1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는데, 이 말은 목자겸 교사들이 많이 되지 말라는 의미다. 이러한 직분은 '선물'임을 가만할 때 분명 소명을 받아야 하며 더 큰 심판을 염두에 두고 섬겨야 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각 분량을 따라 섬기는 이들이 모두 복수라는 것인데, 단지 한 사도만 있지 않고 한 대언자 혹은 한 복음전도자 한 목자및 교사만 있지 않고 모두 복수이다. 이것은 소위 '교황' 처럼 자신을 홀로 신격체로 군림하려는 이는 거짓임을 밝힌다.
이러한 선물 혹은 분량은 그 분명한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성도들을 구비함'이며 (12절) 그러한 구비 혹은 준비는 '섬김의 일 안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 안으로 (를 위해)' 있다.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지 13절은 설명하는데,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그 아들의 믿음과 지식의 일치함 안으로, 완전한 사람 안으로,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함의 분량 안으로 까지' 라고 한다. 즉 우리의 성장은 각 개인의 신앙의 성장만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과 지식의 일치함'을 통해 즉 그리스도의 어떠하심과 하나가 되는 것을 통해, '완전한 사람' 즉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완전해지고, 결국 '그리스도의 충만의 장성함의 분량'까지가 그 목적이 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했지만 아직 그 머리에까지 자라지 못했다. 교회가 이 땅에서 행해야 할 것은 전도, 구제, 예배, 교육 등 적지 않지만,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에게까지, 즉 그 신성에까지 성장하는 것이 교회의 목표다 (15절).
16절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원어로 '그분으로부터 온몸이 공급의 모든 마디를 통해 함께 연결되고 결합되고 있습니다. 각 지체의 분량안에 일함을 통해 몸의 성장을 아가페 안에서 그 자신을 건축함 안으로 하고 있습니다' 정도가 된다. 교회가 성장하는 힘과 에너지와 생명은 '그분으로부터' 즉 주님 자신으로부터지만, 그러한 것들이 전달되는 것은 위에 언급된 4가지 소수의 사람들이 결코 아니라, '공급의 모든 마디를 통해' 즉 큰 자나 작은 자 모두가 각자 함께 연결되고 결합됨을 통해 공급된다. 이것은 우리에게 익숙한 한 목회자 혹은 설교자가 주일 예배 말씀 선포를 통해 교회가 자랄 것이라는 예상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각 사람이 받은 바 은혜를 공급하는 마디가 되지 못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 아닌 것이다.
주님, 바울이 본 이상을 우리도 보게 하소서. 현 상황 보다는 성경의 기록을 믿게 하소서. 우리로 믿음 안에 거하게 하소서. 마지막 때에 이러한 부흥을 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