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도우시는 성령님 (엡 4:25-32)

소위 '최대계명'은 첫째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이며 '그와 같'은 둘째는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이다. 이에 대해 율법교사가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오늘 25절은 먼저 우리의 직접적인 이웃이 누구인지 밝힌다. '확대된' 이웃이라는 개념도 있겠지만, 먼저 우리의 이웃은 '지체들'임을 밝히는데, 주님께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세우시는 이유는 그 안에서 먼저 뜨겁게 아가파오하며 서로들 용납되기를 배우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먼저 '각자 자기 이웃과 함께 진리를 말하고 있'어야 하는데, 형제 자매들에 대해 거짓증거하는 것은 악한 것이다. 이 말은 동시에 죄를 숨기고 덮어주는 것에만 급급하는 것 역시 거짓임을 깨닫게 한다. 형제가 죄를 지으면 사람 자체는 불쌍히 여겨야 하지만 그 죄에 대해서는 (가능한 지혜롭게) 분명히 다루어야 하는데, 마 18:15에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즉 처음에는 직접 개인적으로 가서 권고할 것을 말한다. 많은 경우 이렇게 하지를 못하고 뒤에서 말을 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 눅 17:3은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말씀하는데, 형제가 죄를 범할 때 그냥 묵고하고 덮어주라 말씀하지 않고 분명히 '경고하라'고 말씀한다. 경고를 받고 회개할 때에야 비로소 용서할 수 있다. 용서는 우리 자신이 먼저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26절은 원어가 특이한데, '화내어지고 있으라' 즉 수동태로 되어 있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화를 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를 화나게 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 것이든 아니든) 화를 내게 된다. 바울은 이 화를 내는 것에 있어 오히려 화를 내게 되라고 명령한다. 약 1:20는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고 말씀하는데, 야고보와 바울은 이렇게도 맞지 않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야고보는 '사람의 화'을 말하는 것이고 바울은 '화를 냄' 자체를 말한다. 둘 다 모두 같은 단어이지만, 감정을 가진 인간이 아예 성을 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 동시에 정상적이지도 않다. 주님께서도 성을 내셨던 적이 있다. 다만 '그리고 (혹은 그렇지만 kai) 죄를 짓고 있지 말라 여러분의 분노 위에 해가 지지 말게 하라'고 말씀하는데, 우리는 거룩한 분노를 배워야 하는 반면, 인간의 천연적 성냄으로 인해 죄를 짓는 것에 주의해야 한다. 화를 내면 감정 조절에 실패하고 일을 그르치기 쉽기 때문인데, 따라서 분노 자체에 묶이지 말고 왜 화를 내는지 이유를 잘 생각하고 파악하여 하루를 넘기기 전에 감정적인 정리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문제는 꽤나 심각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는 사항이기에 27절은 '마귀에게 (여러분은) 틈을 주지도 말라'고 명한다. 마귀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자주 건드린다. 이기는 자는 격한 화가 일어도 그 가운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지킬 수 있도록 훈련받은 이들이다.

28절은 특이한 명령을 한다. '도둑질하고 있는 (자는) 더 이상 도둑질하고 있지 말라'고 하는데, 이 편지는 세상 죄인들에게 하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1:1)'이 그 대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운데 '도둑질하고 있는 (현재진행형)'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도둑질은 비교적 가벼운 죄로 여겨질 수 있지만 사실 십계명에도 '살인, 간음' 다음에 오는 계명이고, 그 후에 '거짓 증언'이 온다. 사실 인간 사회의 범죄라면 이 네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인데, 살인이나 간음도 확대 해석할 수 있듯이 이 도둑질 역시 더 깊이 묵상한다면 많은 것들이 이에 걸리게 됨을 볼 수 있다. 단지 남의 것을 훔치는 것만이 아니라, 소위 '불로소득'을 비롯, '말세에 재물을 쌓는' 것 (약 5:3) 그리고 근무시간에 개인적인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것 등이 모두 도둑질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 바울은 '도리어 소유가 필요한 (자들에게)' 눈을 돌리고, 그들에게 '나눠 줄 것이 있도록 자기 손들로 선한 일을 하고 있음으로 수고하고 있으라'고 명한다. 자기 손들을 가지고 합법적인 일을 함으로 그들에게 나눠 줄 것이 있게 하라는 것인데, 일하는 것 자체가 '수고 (혹은 고생)'이다. 우리는 돈이 있으면 돕겠다 라거나 혹은 그 외에 편한 방법으로 다른 이들을 도우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말씀은 이러한 일에 수고스러움이 요구됨을 보여준다.

29은 28절과 형태가 비슷한데, '어떤 썩은 말이라도 여러분의 입 밖으로 튀어나와지게 하지 말라'라고 먼저 '하지 말라'고 말한 후에 '다만 필요의 채움을 세우는 데 어떤 선한 (것)이 있다면 (말을 나오게 해서) 듣고 있는 이들에게 은혜를 줄 수 있도록 (하라)'고 명한다. 흥미로운 것은 '필요 (혹은 가난)'가 있어서 채움 혹은 나눔이 요구될 때 먼저 '물질'이 아니라 앞서 '입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는 말' 처럼 '입'으로 먼저 '듣고 있는 이들에게 은혜를 줄 수 있도록 하라'고 명한다. 이 모든 명령은 현재진행형 직설법으로 직접적인 명령들인데, 사람들은 그 가난을 채우기 위해 물질이 물론 필요하지만 단지 물질만 준다면 그들을 거지 취급하는 것이 되어 버릴 수도 있다. 서로 물질로 도움을 주고 받을 때 우리 모두는 지체들이며 형제들임을 잊지 말아야 하는데, 따라서 '입으로 은혜를 채우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

30절은 갑자기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말라'고 명하는데, '슬프게 하다'는 현재진행형 능동태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할 수 있다는 의미다. 갑자기 이러한 말이 나오는 것 같지만 '그리고 kai'가 있어서 앞의 '말하는' 것과 연관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우리가 어떤 말을 하는 가에 따라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할 수 있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즉 성령은 어떠한 힘이나 에너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삼위 중 한분으로 '파라칼레오' 즉 '옆에서 부르시며 조언하시는' 분으로서 바울은 '그분 안에서 여러분은 구속의 날 안으로 인침 받았습니다'라고 증언한다. 인치시는 것은 '택함'을 의미하는데, 우리가 택함받은 이들로서 우리의 말이 성령을 근심하게 하면 안될 것이다. 우리는 악한 감정에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서로 세우며 고르게 하는 말을 하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그래서 31절은 '모든 악독과 분노와 성냄과 고함침과 비방을 모든 악과 더불어 여러분들로부터 들추어(내어)라'고 명하는데, 성도들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아직도 우리 가운데 많은 악독과 분노와 성냄 그리고 고함침 비방 등 모든 악을 우리들과 분리시켜야 함이 필요함을 말씀한다.

이것을 할 수 있는 방법은 32절에 나오는데, '대신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되어져서 서로들 친절하게, 인자하게 되어라'고 말씀한다. 개역개정은 '서로 용서하라'가 명령처럼 번역했지만, 이 부분은 동사구로서 뒤 '서로들 친절하게, 인자하게 되어라'를 수식한다. 우리가 서로 친절하고 인자하게 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셨고 또한 이러한 용서로 서로 용서되어지기 때문인데, 이것을 기억한다면 서로간에 친절하고 인자할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 많은 명령들은 부담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직접적인 명령들은 우리를 살리며 경고를 주며 바르게 걸을 수 있게 함을 믿습니다. 불가능하고 불공평한 일들을 명하시지 않고 이미 우리를 인치셨고 옆에서 용기를 주시며 우리로 온전하게 성장하도록 도우시는 성령께서 도우심을 봅니다. 어쩌면 서로 친절하고 인자하게 대하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주님께서는 인간의 천연적인 모습이 아닌, 거듭난 생명의 어떠함으로 우리가 행할 것을 말씀하심을 압니다. 주님의 도우심을 구합니다. 우리 안에서 능력으로 더욱 역사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