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버팀으로 서있기 위한 전신갑주 (엡 6:10-17)

10절은 '이제부터 주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셈의 힘 안에서 능력있게 되어지고 있으라'고 하는데, 명령인 동시에 축복이다. 보통 축도에 '이제는... ~지어다'라고 하지만 그에 해당하는 원어에는 '~지어다' 라는 말은 없고 단지 '~하기를'에 해당하는 말만 있거나 혹은 그러한 것도 아예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되어 지고 있으라'고 말하며 강력하게 명령 겸 축복을 한다. 원래 능력은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이 '능력있다'는 중간/수동태로 되어 있는데, 따라서 '주 안에서 그리고 그분의 셈의 힘 안에서' 우리는 능력을 받는다. 다시 말해 능력은 주님 안에 있을 때 나가는데, 만일 주님을 떠나 능력을 행사한다면 이러한 능력은 주님과 상관 없는 것이 된다 (마 7:23).

11절은 '(여러분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라고 시작하는데, '입다'는 2인칭 복수로 되어 있어서 '여러분'이 주어다. 즉 이 전신갑주를 입는 것은 각 개인에 대한 명령 즉 '각 사람은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하지 않고 (에베소) 교회에게 하는 명령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원수를 대항하는 시험의 때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교회는 주님의 군사이기 때문에 특히 이 전신갑주는 교회적인 차원에서 입는 것으로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이어서 이 전신갑주를 입는 이유에 대해 '마귀의 계략들에 대적하여 여러분은 서 있는 능력 받고 있기 위해' 라고 하는데, 마귀는 단수로 되어 있지만 '계략들'은 복수이다. 마귀는 그 싸우는데 있어 능력보다는 거짓과 계략들로 싸운다. 계략이나 모사에 대해서는 오히려 '지혜'가 필요할 것 같지만 여기에는 '전신갑주'를 말씀하는데, 아마도 우리의 목적은 전쟁에 '이기는' 것이 아니라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전쟁은 이미 이겼고 우리는 단지 인내하며 서 있기만 하면 된다.

원수의 '계략들' 중 하나는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피와 육신' 즉 사람들로 착각하게 하는 것인데, 그래서 12절은 '우리에게 싸움은 피와 육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권력들에 대해, 권세들에 대해, 이 어둠의 세상 유력자들에 대해, 천상 안에 악의 영들에 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기록한다. 싸울 대상이 피와 육이 아니라 영적인 존재들이기 때문에 승리의 결과 역시 금방 눈으로 보여지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입어야 할 전신갑주 역시 모두 영적인 것들이다.

먼저 11절은 전신갑주를 '입으십시오' 라고 명하지만, 13절은 ' 이를 통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들어 취하십시오' 라고 되어 있다. 먼저 '취하고' 그 다음에 '입어야' 하겠지만 반대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입는' 것은 '전체'에 대해 말하고 '취하는' 것은 각 사항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라 본다. 흥미로운 것은 계속해서 '서 있음'을 말하는데, '이는 (여러분이) 그 악한 날 안에 대립(對立)할 수 있도록, 그리고 모든 것들을 일해짐에 서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14절 역시 '그러므로 (여러분은) 서십시오'라고 한다. '대립'으로 번역한 말 역시 '대적해서 서다'라는 말이기 때문에 이 두절 안에 '서다'라는 말이 세번이나 나온다. 우리의 싸움은 모두 '서기' 위함이다. 원수를 대적해서 서 있어야 하고, 모든 것들이 되어진 후에도 그 승리를 지키며 서 있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우리로 서 있게 한다.

이 전신갑주에 대해 먼저 14절은 '진리 안에 여러분의 허리를 둘러맴으로, 그리고 의의 가슴받이를 입음으로' 라고 하는데, 세상은 여러 거짓말로 미혹하게 한다. 진리를 받지 않고 그러한 미혹을 '받으면' 싸움에 필요한 힘이 나올 '허리'가 약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 안에' 분명히 있어야 하고 그러한 진리는 마치 우리가 허리띠를 둘러매는 것 처럼 힘을 준다. 우리는 우리를 속이는 세상의 가치관, 진화론, 염세주의, 종교성, 종교연합, 쾌락주의 등등에 대해 진리 안에서 분별해야 한다.

'의의 가슴받이' 역시 필요한데, 허리를 둘러매는 것이 힘을 위한 것이라면 가슴받이는 보호를 위함이며 특히 우리 심장부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가슴은 '마음'이나 '양심'도 포함하는데, 신앙 생활에서 원수는 우리의 마음이나 양심을 비방하고 비난하며 죄책감을 줄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는 우리의 의로 구원받거나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이러한 인식은 원수의 비방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15절은 '그리고 평안의 복음의 준비된 안에 발들을 넣어 묶음으로' 라고 하는데, '서있기' 위해서 우리의 발은 편안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발을 보호할 신발 없이 가시밭 위나 자갈밭 위에 서 있다면 매우 힘이 들것이다. 그래서 '평안의 복음의 준비된' 것 안에 우리 발들을 넣어 묶어야 한다. 우리는 전진할 필요도 없는데, 다만 '서 있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평안의 복음의 준비된 그러한 신발 안에 우리 발들이 넣여 묶여만 있다면 든든할 것이다. 복음과 평안 혹은 평화는 연결되어 있는데, 이미 눅 2:14에서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라고 기록하기 때문이다. 복음은 평화 혹은 평안 eirena이다.

16절은 '모든 것 안에 믿음의 방패를 들어 취함으로, 그것 안에 악한 자의 불 먹인 모든 화살들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는데, 여기의 '들어 취함'도 13절 전신갑주의 '들어 취함'과 동일하다. 방패는 온 몸을 보호하는데 그 정체성은 바로 믿음이다. 우리는 믿음을 '모든 것 안에' 적용해야 하는데, 바로 이 믿음의 방패를 '들어 취할' 때 가능하다. 원수는 여러가지 것으로 우리를 속이지만, 하나님의 자녀들 된 우리를 두려워 한다. 그래서 맞서 싸우는 대신 멀리서 '불 먹인 모든 화살들을' 쏘는데, 믿음의 방패 없이 그러한 거짓이나 비방이나 두려워 하게 하는 것들을 맞게 되면 불이 붙어 번지지만, 믿음의 방패로 막아 내기만 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믿음은 그 모든 불 먹인 화살들의 불을 끄며, 또한 막아내기 때문에 내 몸이나 내 혼에까지 그 화살들이 미치지도 못한다.

17절은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으십시오 또한 그 영의 검을,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라고 하는데, 기본적으로 구원은 우리가 능동적으로 취하는 것도 행하는 것도 아니라 먼저 은혜로 받는 것 혹은 수동태로 '구원되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의 투구' 역시 우리가 '받는 lambano' 것인데, 이 투구는 우리의 머리를 보호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은 군사라면, 그 머리는 그리스도시다. 따라서 구원은 그리스도께 속한 것이고 우리는 그 분을 '받기만' 혹은 '영접하기만 (같은 단어)'하면 된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마지막으로 유일한 공격용 무기인 '검'이 나오는데, 바로 '그 영의 그 검'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에서 '이는 ho, which'은 관계대명사 중성형으로 되어 있다. 그냥 읽으면 '그 검'을 수식하는 것으로 이해해서 '성령의 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하지만, 여기 '검'은 여성명사인데 비해 '성령'은 중성명사로 되어 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검'을 수식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 영'이라는 의미다. 주님께서도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요 6:63). 우리는 그 영이신 말씀을 받아야 하는데, 그 영이신 말씀은 우리에게 검이 된다.

주님, 그 영의 검, 혹은 그 영이신 말씀을 받습니다. 주님의 군사로서 전신갑주를 취하고 또한 입은 주의 몸 되어서 악한 날들 안에 서 있음으로 승리를 지키는 우리들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