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비밀 (요 1:1-13)
1절은 원어로 '태고 안에 그 말씀이 있어왔다 그리고 그 말씀은 그 하나님 앞에 있어왔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말씀이어왔다' 정도로 되어 있다. '처음'으로 번역된 arche는 '고대, 옛, 처음, 우선' 등의 의미로 여기에서는 시간 이전의 때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태고'라고 번역했다. 전에는 '맨 처음'이라고 개인적으로 번역했었지만 아마도 '태고'가 더 나을 듯 하다. '그 말씀'은 '호 ㄹ로고스'인데, 동사는 미완료로 '있었다' 보다는 '있어왔다'가 더 맞다. 즉 '그 하나님 ho theos' 앞에 혹은 앞서 ㄹ로고스가 계시며 그 하나님과 함께 계속해서 계셔왔음을 말한다. 놀라운 것은 원어에는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와서 '하나님은 그 말씀이어왔다'로 되어 있다. '하나님'과 '말씀' 모두가 명사에 주격으로 되어 있어서 이 둘을 바꿔도 별 문제가 없기 때문에 아마도 많은 번역본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다'로 번역한 것 같은데,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무엇이 ~이다'라는 말은 둘이 동일함을 말하기 때문에 바꿔 놓아도 별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그 하나님은 그 아가페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나 '그 아가페는 그 하나님이시다'는 동일하다. 또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25)' 역시 마찬가지다. 주님은 부활이시고 생명이시지만, 부활 역시 주님이시고 생명 또한 마찬가지다. 아마도 처음부터 '말씀'을 말하기 때문에 아마도 계속 주격으로 번역한 것이리라. 중요한 것은 중간에 갑자기 말씀이 생긴 것이 아니라 태고부터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혹은 앞서 혹은 함께 계셔 오셨다는 것이다.
2절은 같은 말을 하는 것 처럼 들리는데, '그가 태고 안에 그 하나님 앞에 있어왔다' 라고 한다. 하지만 원어에서는 '그가' 바로 앞에 '말씀'이 있기 때문에 앞서 1절 마지막 부분의 주어가 '하나님'임을 다시 말해준다. 즉 '하나님은 말씀이어 왔다, 바로 그 말씀이 태고 안에 그 하나님 앞에 있어왔다'가 된다. 요한은 왜 이렇게 반복되는 것 같은 말을 하고 있을까? 이 하나님과 말씀 ㄹ로고스에 대해, 그는 '태고'의 즉 시간 이전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신비이며 비밀이다. 오늘 말씀 구간을 생명의 삶은 13절로 잘랐지만, 원래는 14절까지 이어져야 한다. 이 비밀된 '호 ㄹ로고스'가 육신이 되는 또 다른 신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절은 이 'ㄹ로고스'의 어떠하심을 증언하는데, 보통 이 ㄹ로고스를 '기록된 말씀'이라고 해석해서 '성경' 특히 '구약' 혹은 '율법'으로 많이 이해하는 면이 있지만, 앞에서도 미리 말한 바, '하나님은 말씀이셔 왔기' 때문에 이 ㄹ로고스는 '만물이 그를 통해 되어지고 그가 없이는 그 된 것이 하나도 되어진 것이 없다' 라고 하듯 만물의 창조의 근원이 되심을 밝힌다. 전에는 이러한 것을 추상적 혹은 '영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제 현대 물리학의 발전이나 혹은 컴퓨터 작동 원리만 조금 이해해도 이것이 매우 현실적이며 실현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이 '말씀 호 ㄹ로고스'를 '데이터베이스'와 비교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쉬웠는데, 데이터베이스는 컴퓨터 안 저장된 자체로는 그 형태를 알기 어렵지만, 인쇄되거나 그를 통해 물리적으로 나타나면 (소위 populate 될 때) 마치 '무'에서 '유'가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4절은 '그 안에 생명이 있어왔다 그리고 그 생명은 그 사람들의 빛이어왔다' 라고 하는데, '되다' 즉 창조를 말하다고 이제 '생명'을 말한다. 무언가 창조되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생명이 있어야 하는데, 이 '생명'은 창조되지 않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생명 'zoe'이다. 이 생명은 또한 '사람들의 빛이' 되어 왔음을 말하는데, 따라서 이 빛은 태양이나 우주의 창조되어진 은은한 (ambient) 빛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사람에게 비추어 생명과 힘을 주는 하나님의 빛이다 (요일 1:5).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은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빛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께서 비추시는 그 빛을 말하는데, 따라서 5절은 이 빛이 '그 어둠 안에 비추고 있다'고 한다. 갑자기 '어둠'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만물을 그 빛으로 밝게 창조하셨지만, 천사들과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어둡게 되었다 (롬 1:21). 하지만 이제 이 빛이 '그 어둠 안에 비추고 있다' 즉 지금 비추고 있음을 말씀한다. 어두워진 마음에 그리스도의 빛이 비추고 있다! 빛이 비출 때 어둠은 이길 수 없는데 그래서 '그 어둠은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라고 한다. '깨닫지 못하더라' 혹은 '이기지 못하더라'고 번역된 단어 katalambano는 '붙잡다' 혹은 '잡아 버리다' 정도의 의미다. 어둠은 깨닫지도 못하고 빛을 이길 수도 없지만, 그 자체로 빛은 취할 수 없다. 오직 빛의 자녀만 빛은 취하여 붙잡을 수 있다.
6절은 '하나님께로부터 파송 받은 사람이 되었다 (생겨났다, 지음 받았다) 그의 이름은 요한(이다)' 라고 하는데, 이 '요한'은 바로 이 복음서를 쓴 요한이 아니라 15절 이하를 보면 침례자 요한임을 알 수 있다. 7절은 '그가 증언 안으로 왔으니 곧 그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고 그리고 모두가 그를 통해 믿게 하려 함이었다' 라고 하는데, 빛이라면 모두가 볼 수 있어야 하고 따라서 특별히 증언하는 이도 필요 없을텐데 요한이 따로 파송받은 사람이 되었다.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이 빛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태양광선 같은 가시광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눈으로는 볼 수 없다.
8절은 '그이는 그 빛이 아니어왔다 그러나 곧 이 빛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다' 라고 하는데, 미완료 시제로 되어 있어서 그가 한때 빛이 될 수도 없고, 언젠가 빛이 될 수도 없음을 분명히 한다. 대신 그는 증언자이다. 그래서 9절은'그 참 빛이 있어왔다 곧 세상 안으로 들어와지는 각 사람에게 비추고 있다' 라고 하는데, 여기 '참'은 '진리 aletheia'와 연관된 말이다. 참 빛이시며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깨닫던 그렇지 못하던 간에 마치 태양 처럼 '각 사람에게 비추고 있다' 그래서 이 비추고 계심을 증거하는 요한 같은 증인이 필요하다.
10절은 '그가 그 세상 안에 있어 왔다 그리고 그 세상은 그를 통해 되어왔다 그리고 그 세상은 그를 알지 못했다' 라고 하는데, 세상은 하나님을 거역해서 타락했지만 그러한 세상이라도 하나님은 중간에 포기하시고 상관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세상 안에 계셔 왔음을, 또 세상은 그를 통해 되어왔음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되어지는 것들 즉 태양 빛의 밝기 라던가 태양계의 여러 혹성들의 궤도라던가 달의 궤도 등등이 주님을 통해 계속해서 '되어오지' 않았더라면 모두 이탈해서 망했을 것이다.
이제 11절은 '태고'도 아니고 10절의 보이지 않은 신비로운 분으로도가 아니라 2천 년 전 시간 안에서 자기 (백성들) 안으로 그가 오셨음을 말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기 (백성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여기 '자기 (백성들)'로 번역한 'ta idia'는 영어로 'his own'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데 복수로 되어 있다. 보통 '하나님의 백성' 혹은 '이스라엘'을 말할 때는 단수로 되어 있지만 여기는 복수로 되어 있는데, 따라서 다만 그의 택하신 '이면적 유대인' 이스라엘 백성만을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만물이 그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12절은 '그러나 누구들이건간에 그를 취한 (이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 권위를 주셨다 (곧) 그의 그 이름 안으로 믿고 있는 자들에게' 라고 하는데, 앞 11절 '영접하다 parelabon'라는 말에 비해 여기는 '취하다 elabon'으로 되어 있는데, 모두 능동태로 되어 있다. 소위 구원의 확신은 능동적인 면이 있다. 우리는 구원을 택하고 취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흥미롭게도 자녀들이 '되다' '취하다' '주셨다'는 모두 아오리스트 시제라서 완료 즉 과거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소위 '구원은 확신'은 내가 '이미' 구원받았음을 믿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가 구원을 붙잡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실수가 없으시고 영원한 것이지만, 인간의 입장에 있어 그것은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는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입장으로서는 구원을 잃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누가 확실히 구원받았는지 혹은 구원 받는지 알 수 없다.
이러한 것을 13절은 더욱 확실히 설명하는데, '그들은 피 밖으로 부터가 아니고 육신의 뜻 밖으로도 아니며 사람의 뜻 밖으로도 아니고 다만 하나님 밖으로 되다' 정도로 되어 있다. 즉 이 소위 거듭남은 영적인 것이라서 인간이 판단하기 쉽지 않은 문제다. 우리는 겸허히, 하지만 능동적으로 주님을 취하며 계속해서 의지해야만 한다.
주님, 태고부터 이어져 오신 주님의 어떠하심은 신비 그 자체임을 봅니다. 많은 실수를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난 사람임을 취합니다. 주님의 생명이신 그 빛을 오늘도 비추고 계심을 감사합니다. 생명 주시는 그 빛, 진리의 빛, 치료하시는 그 광선을 오늘도 충만히 비추소서. 나의 어떠함을 비추시고 주님의 것으로 변화시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