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우주와 역사를 통한 가장 위대한 역설 (요 1:14-18)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그들 나름대로의 신격 존재들을 숭배한다. 그래서 '신' 혹은 'God'이라는 말에 대해 큰 불편함이 없다. 물론 불교나 유교는 엄밀히 말해 신적 존재를 숭배하는 것이 아니었으나 후에 종교적 내용들이 첨가되어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불교는 쉽게 말해 인간 자신이 깨달음을 통해 해탈하는 것이 목적이고, 유교는 인간사회를 정의롭게 살기 위한 통치 혹은 정치 이념이다. 그 외에도 정령 숭배나 샤머니즘, 과거 헬라의 다양한 신화 그리고 일본의 독특한 신도이즘 등이 존재한다. 하지만 진정한 종교라고 불릴 수 있는 것들은 어떠한 신적 존재를 숭배해야 하는데, 크게 다신교와 유일신교 그리고 단일신교로 나뉜다. 다신교는 신격들이 둘 이상인 것이고 단일신교는 단 하나, 그리고 유일신교는 숫자적으로는 하나는 아니지만 하나로 믿는 것이다. 다신교는 과거 그리스 신화와 현재 힌두교가 대표적이고 단일신교는 유대교와 이슬람, 그리고 유일신교는 기독교가 유일하다.

요한은 1장 1절부터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론하는데, 따라서 God이 아닌 Jesus라는 이름은 모든 종교들에게 배척을 받는다. 인간을 초월한 '거룩한' 신성이 결코 세속의 인간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선교사들도 God이라고 말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Jesus라고 할 때 배척 받음과 고난이 시작된다. 눈에 보이는 신이라면 우리와 같은 수준의 존재로 여길 수 있지만, 오히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왔다는, 그리고 인간이 되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여자를 통해 태어났으며 33년 반을 이 땅에 살고 가셨다는 얘기는 절대적 존재 혹은 지존하는 신격을 숭배하는 이들에게는 큰 걸림돌이 된다.

하지만 요한이 전한 복음은 이러한 걸림돌로 시작하는데, 오늘 말씀 14절은 '그리고 그 말씀은 육신이 되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장막치셨다 그리고 그의 그 영광을 (우리가) 보았다 아버지로부터 독생의 것 처럼 영광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이라고 한다. 1장에는 '되다'라는 말이 매우 자주 나오는데, 어떠한 것이 완전히 다른 또 다른 어떠한 것으로 되는 것은 물리적으로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요즘 물리학은 이러한 것이 사실 가능하다고 믿는 시대가 되었다. 무에서 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전혀 다른 차원의 어떠한 것이 또 다른 차원의 어떠한 것으로 되는 것이 그리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그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 역시 그러한데,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앞에 계신 그 말씀 더우기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이 시간 안에 혹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때에 육신이 되었는데, 여기 '되다'의 시제는 아오리스트로서 '완료' 즉 언제 그렇게 되었었다 라는 의미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분명 2천년 전 주님께서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지만 주님의 성육신은 그 시간 자체를 초월한다. 이미 구약에서도 '인자같은 이'로서 나타나신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 가능한 방법을 통해 그 말씀은 육신이 되셨다. 그런데 바로 뒤에 '우리 안에 장막치셨다'라고 말하는데, 과거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 하나님의 장막이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함께 거하셨던 것과 같이, 이제 주님이 오심은 우리 안에 장막 치심으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우리가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이다. 우리가 볼 때 마치 하나님을 보는 것 처럼 '영광'을 보는데, '아버지로부터 독생의 것 처럼 영광을,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이라고 되어 있다. 여기 '독생의 것 monogenous' 은 꽤 특이한 말인데, 생명의 삶에 그 해설이 나온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단어가 유독 주님의 신성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동일한 단어가 눅 9:38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소리 질러 이르되 선생님 청컨대 내 아들을 돌보아 주옵소서 이는 내 외아들이니이다' 그리고 히 11:17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등 '외아들'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요한은 이 단어를 쓰며 주님의 신성, 즉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되신' 아들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복음서나 요일 1:14 등에는 이 단어를 계속해서 쓰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요한의 이 모든 기록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하기 위함인데, 먼저 '영광'이라는 말을 한다.

'영광'은 말 그대로 빛이 영롱하게 나타나는 것이고 헬라어 '독사' 역시 비슷하며 '존귀' 등을 나타낸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신성'과 관계가 있어서 '신의 임재' 혹은 '신의 나타나심'에 쓰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아무 생각없이 '만나뵈서 영광입니다' 라는 말은 어쩌면 신성모독일 수 있는 말이다. 이 영광은 '신' 혹은 '하나님'에 대해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한은 지금 이 말을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해 하고 있다.

'영광' 후에 '은혜와 진리'라는 말이 따라 오는데, '하나님이 나타나심'이 영광이라면 그 나타나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은혜'다. 은혜라는 것은 무언가 값없이 받는 것이라 배우지만, 사실 참된 은혜는 그 받는 것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렸는데, 목숨을 구하게 됐다면 그것 역시 은혜지만,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목도하고 그 어떠하심을 경험한다면 그것이 바로 은혜다. 오늘 진리를 깨달으면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누가 말했다지만, 바로 오늘 하나님을 만나 그 분의 어떠하심을 체험한다면 인간으로서 가장 값진 누림을 얻은 것이다.

'진리'라는 말 역시 매우 의미심장한데, 원래 aletheia라는 말은 '참' 혹은 '참된' 즉 '진짜'라는 말로 '진리'라는 의미도 물론 있지만, '현실' '실재'를 의미한다. 주님의 영광을 목도하고 그 어떠하심을 체험하는 은혜를 누릴 때 우리는 진짜가 무엇이고 참이 어떠한 것임을 이 현실 세계에서 알고 또 누릴 수 있다. 앞으로 요한은 이 '진리'를 계속 말하는데, 이 단어는 4장에 '예배 (혹은 경배, 원어로는 '절')'와 연결된다. 우리의 예배는 따로 '예배 시간'이나 '교회당' 처럼 어떤 장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영 안에서' 그리고 '진리 안에서' 즉 바로 이 일상 생활, 현실에서 한다는 것이다. 영은 현실을 초월한 어떠한 것이지만 진리 혹은 실재는 현실, 특히 현실 가운데 그 핵심인 실재를 말한다.

15절은 다시 요한의 증언을 말하는데, '이분이 내 뒤에 오고 계시는 분이라고 내가 말했던 분이시다 내 앞에 되셨으니 (그가) 내 앞에 이시기 때문이다' 라고 한다. 사촌지간이던 침례자 요한은 주님보다 시간적으로 먼저 태어났고, 공생애 역시 먼저였지만, 주님의 신성은 요한보다 앞 이시다. 주님은 항상 '에고 에이미'시다.

16절은 '그의 그 충만 밖으로 우리 모두는 받았다 따라서 (그리고) 은혜 대 은혜를' 이라고 하는데, 영광이 비취시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그 충만으로부터 우리 모두가 받았음을 말하는데, 그것이 은혜지만 그렇게 받으니 더욱 은혜가 된다. 여기 '은혜 대 은혜를' 이라는 말을 개역 개정은 '은혜 위에 은혜' 그리고 한글 킹제임 흠정역은 '은혜를 대체하는 은혜니' 라고 번역했는데, 아마도 원어의 anti라는 말이 '대적하다, 대체하다'이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 같다. 영어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인 against라는 말이 종종 한글과는 다르게 쓰이는데, 단지 '대적하다' 혹은 '대항하다'라는 의미 보다 어느 무엇과 비교(혹은 대조) 할 때 쓰인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찾을 때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리스트와 비교해서 찾는 것을 against the roster 라고 한다.  그래서 이 은혜를 보니 진짜 은혜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단지 '은혜가 충만하다'로 끝내지 않고 '하린 안티 하리토스' 라고 쓴 것은 그 은혜를 체험할 때 마다 더욱 은혜가 넘쳤기 때문이다. 은혜를 체험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체험하니 더욱 은혜, 더 깊은 은혜, 진짜 은혜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의 은혜다.

17절은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기록하는데, 이 모든 '말씀' '은혜' '독생한' 등의 단어들이 바로 그 분을 가리킨다. 요한은 구약의 모세를 잊지 않고 '그 법' 즉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다고 하는데, 구약의 모든 것이 바로 이 율법과 또 선지자 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그 둘은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다. 율법은 은혜와 진리와 다르지만 이 셋은 떨어질 수 없다. 율법 없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기준을 알 수 없고 따라서 죄를 정의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용서하심과 생명 주시는 '그 은혜와 그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결국 이 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가 되셨다.

이제까지 계속 주님의 신성을 말했지만 분명하게는 말하지 않았다면, 18절은 '하나님을 아무도 본 적이 없다 그 아버지의 그 품 안으로 계시는 독생의 하나님이 나타내셨다'라고 '독생의 하나님' 즉 말씀이 독생하여 육신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며 이 '독생' 또한 '하나님이 되신' 혹은 '하나님으로부터 되신' 그리스도의 신성을 말해준다. 성육신은 차원이 전혀 다른 신성과 인성이 하나가 된 역설적인 사건인데, 인간의 이해로는 결코 받을 수 없는 은혜가 충만한 경악할만 일이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셨기에 죽을 몸 (mortal body) 육신인 우리가 신성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벧후 1:4).

주님, 놀라운 성육신 사건, 그 의미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요, 그 은혜를 묵상하며 더욱 그 은혜를 보고 체험하며 누리게 하소서. 우리 가운데 장막 치심으로 현실 세계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영 안에서 그리고 실재 안에서 주님을 섬기며 동행하며 따르게 하소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독생하신 분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