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파송받은 자의 이단적으로 보이는 행위 증거 (요 1:19-28)

유대인들이 침례자 요한에 대해 듣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요단까지 사람들 특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그에게 보내어 과연 그가 누구인지 알아보려 했다. 이에 대해 침례자 요한은 '그리고 그가 시인하고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라고 시인했다 (20절, 원어참조)' 라고 하는데, 이 '시인하다'는 헬라어로 homologeo 즉 문자적으로는 '같은 (것을) 말하다'의 의미이다. 이 말이 20절에는 두번이나 연거푸 쓰였는데, 더우기 '부인하지 않았다'라는 말도 추가했다. 상식적으로는 사도 요한이 이렇게까지 기록할 필요가 없었을 듯 하지만, 당시 침례자 요한의 인지도나 영향력 때문에 혹시나 그를 그리스도로 오인하지 않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분명한 선을 그은 것이다. 침례자 요한은 그의 사역에 대해 자신의 영역과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적어도 당시까지는) 따라서 자신 생각에 맞는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 파송된 소명에 따라 '함께 말했다'. 파송받은 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함께 말하는 homologeo' 사람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침례자 요한이 '나는 그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라고 말할 때 원어로 '에고 웈 에이미 호 흐리스토스' 라고 하는데, 오직 주님만이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실 수 있기에 그는 그 중간에 '웈 아니다'를 넣어 분명히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님을 증언했다. 이것은 23절에 '나는 그 선지자 이사야가 말했던 것 같이 주의 그 길을 곧게 하십시오 라고 그 광야 안에 외치고 있는 목소리 (입니다)' 라고 한 답변에서 '에고 ~에이미'라고 말할 수도 있었지만 여기에는 '입니다' 즉 '에이미'가 생략되었다. 이 '에고 에이미'는 구약의 '여호와 (나는 ~이다)'와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19절에는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침례자 요한에게 보냈다고 하지만 24절은 좀 더 자세하게 '바리새인들'이라고 한다. 4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에는 이 '유대인'이라는 말이 그리 좋은 말로 나오지 않는데, 그 중에서도 주님께서 싫어하셨던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을 보내어 침례자 요한의 정체를 알기 원했다. 요한의 사역이 인지도가 높아지자 소위 '정통'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영역을 수호하기 위해 요한이 하는 사역의 정통성을 알아 보기 원했던 것이다. 그들은 성경은 많이 알아도 영적인 안목은 없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침례자 요한에게 혹시 그리스도인지 아니면 엘리야인지 혹은 그 선지자인지 물어 보는 것인데, 요한은 '나는 그 선지자 이사야가 말했던 것 같이 주의 그 길을 곧게 하십시오 라고 그 광야 안에 외치고 있는 목소리 (입니다, 23절)' 이라고 답한다.

그러자 그들은 '그러면 왜 침수시키고 있는가 만일 당신이 그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선지자도 아니면?' 이라고 물었는데, 여기 '침례' 혹은 개역개정의 '세례'로 번역한 말은 baptizo라는 말로 문자적으로 '물에 빠뜨리다, 물에 적시다, 침수하다' 등을 의미한다. 생명의 삶 해설에는 이것이 과거 구약의 결례 즉 '씻는 것'으로 설명했지만, 그렇다면 그것은 구약의 율법을 따르는 것이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침례자 요한은 듣도 보도 못한 행위, 즉 '회개를 위한 침례 (혹은 침수 마 3:11, 막 1:4, 눅 3:3, 행 13:24,19:4)'를 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그러한 새로운 것을 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권위 즉 '그 선지자'나 그리스도나 혹은 엘리야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단지 '목소리'라고 답한 침례자 요한에게 실망 혹은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이사야의 말은 주님께서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마 17:12)' 라고 말씀하셨던 것 처럼 실은 침례자 요한의 사역이 엘리야의 그것임을 분명히 말해준다. 성경은 많이 알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었지만 그들의 눈은 가려졌었다.

침례자 요한은 26-27에도 계속 그의 '곧게 하는 사역' 즉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사역을 하고 있는데, 28절은 '이것들은 요한이 침수시켜왔던 곳 요단 건너 베다니 안에서 (였다)' 라고 기록한다. 이 요단 강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강인데, 이제까지 '침례' 혹은 '침수'는 없었지만 실은 과거 구약에 두번이나 그러한 사례가 있었고 특히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험했었다. 바울은 이에 대해 고전 10:2에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침례를 받고' 라고 기록했는데 광야 구름 기둥 안에서 생활하던 사건과 홍해를 건넌 사건 모두가 침례의 예라는 것이다. 그런데 약속의 땅 앞에 이르자 강이 하나 더 등장하는데 바로 요단이다. 홍해를 건넘으로 애굽 즉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 좋은 땅으로 완전히 들어가기 위해 요단을 다시 건너야 한다.

문제는 홍해는 물론이고 요단까지 건넜음에도 그들은 오히려 세상과 육적인 것들을 갈망하며 추구했고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은 완악한 백성이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상황에 대해 '회개하는 침례'가 필요했고 아이러니 하게도 다시 요단에서 행해진다. 명목적으로는 그들은 아직 유대인들 즉 이스라엘 백성이었지만 이면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이들로서 그들의 육이 죽음을 통과하는 회개가 필요했다. 따라서 침례자 요한이 행했던 이 침수 사역은 이단적인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에게 참으로 반드시 필요했던 사역이다. 오늘 이러한 사역이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에게도 필요하다. 막 16:16는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말씀하는데, 사람들은 성경의 다른 몇개 구절들 예를 들어 고전 1: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침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롬 10: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등을 들어 침례 혹은 세례가 필요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성경의 한 구절 조차 중요한데, 믿으면 침례를 거불할 수 없다. 믿는 것은 개인의 이면적인 문제라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침례는 공개적인 선포이며 증거이며, 선을 분명히 긋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 세상을 떠나 강을 건너고 육신의 어떠함을 십자가에 못박은 주의 백성으로서 살게 하소서.  주님 다시 오심을 예비하는 온전한 침수로 그리스도와 장사되고 다시 일어나는 오늘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