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만을 증거하는 참된 종 (요 1:29-42)

주님의 사역 시작 즈음이다. 중요한 점은 엘리야로 온 침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 주님께서는 개인적으로 소리높여 자신을 증거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일개의 목수가 자신을 나타내기란 힘든 것이다. 하지만 침례자 요한의 사역으로 비교적 주님께서는 인지도를 가질 수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침례자 요한이 온 이유이기 때문이다. 29절은 요한이 주님에 대해 처음 증거한 내용으로, '보십시오 그 하나님의 그 어린양을. 그 세상 그 죄를 가져가고 있습니다'로 되어 있다. 요한 자신에 대해서라면 침례 자체는 물론이고 특이한 외모나 식습성 등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었지만 그가 자기 자신에 대해 증거하지 않고 주님께서 바로 '그 하나님의 그 어린양'이심을 증언했다.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들이나 혹은 믿는 이들만의 죄들을 가져가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죄' 즉 단수의 죄를 가져가시는데, 현재진행형으로 되어 있다. 주님의 구속 사역은 단지 십자가 사건만이 아니라 주님의 오심 자체로 이미 시작하셨는데, 만물이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한 그 자체 즉 죄의 본질을 가져가기 위해 오셨다. 따라서 이제 주님의 공로로 인해 하나님 앞에 죄는 더 이상 효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죄들을 짓는' 것이 죄가 아니라 '믿지 않는 것'이 바로 죄가 된다 (요 16:9).

30절은 원어로'그분이 내가 그에 대해 내 뒤에 오고 계시는 사람이라고 말했던 분입니다 나보다 앞섬을 소유하셨고 이는 그가 내 앞에 계셔왔기 때문입니다' 정도가 되는데, 시간적으로는 요한이 나이가 조금 더 많지만, 주님께서는 태초부터 계셔 오신 분이기에 '앞섬을 소유하신' 분이시고 따라서 요한 앞에 계셔 오신 분이시다. 인간이 이해하는 시간적 개념을 뛰어 넘는 말인데, 그래서 헬라어에는 시간에 해당하는 말이 크로노스 라는 말과 카이로스 라는 두가지가 존재한다. 카이로스는 크로노스를 뛰어 넘는 말이며 주님의 예정하심과 인도하심은 카이로스적이다.

31절을 보면 침례자 요한은 주님을 알지 못했다고 하는데, 여기 '알다'는 'eido'로 '알다, 기억하다, 보다, 깨닫다' 등을 의미한다. 그리 가깝지는 않았더라도 둘 사이는 사촌지간이었는데, 그럼에도 이제까지는 침례자 요한이 주님에 대해 알지 못했다. 흥미롭게도 같은 말을 33절에 거듭 말하는데, 정말이지 침례자 요한은 주님께서 메시야심을 몰랐던 것이다. 멀리서나마 함께 자라오며 가끔 서로를 보아온 사이로서 주님께서 메시야라는 것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침례자 요한은 그를 보내신 분 즉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는데, '나를 보내어 물 안에서 침수시키고 있게 하신 이, 바로 그분이 나에게 말씀'하신 그 음성에 따르면 '누구 위에든 그 영이 내려와서 그 위에 머물고 있는 것을 보거든 그가 성령 안에서 침수하고 있는 분이다' 라고 하셨고 바로 주님이 그 분이었다. 그래서 34절은 '그리고 내가 보았고 그가 하나님의 그 아들이심을 증언했습니다' 라고 기록한다.

이 침례자 요한의 증언은 계속됐는데, 자신을 따르던 두 제자들 앞에서도 다시 주님에 대해 '보시오 하나님의 그 어린 양 (이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제자 둘은 주님을 따르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진정한 사역자의 모습이다. 주님의 종들 그리고 사역자들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이끄는 이들이 아니라 주님께 인도하고 주님께 이끌리게 하는 이들이다 (요 12:32). 자신의 제자들을 양산하는 이들이 아니라 주님의 제자들로 삼아 주님께 영광돌리는 이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주님께서 돌이켜서 이들을 보시고 하신 말씀인데, '아이구 잘 왔다. 내가 풍성한 선물을 주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라고 말씀하신다. 어쩌면 '왜 왔니?'라는 물음인데, 요즘 교회들이 사람들을 얻으려고 사탕발림으로 여러 선물을 주거나 복음을 사람들의 입맛에 맞게 변질시키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친히 선택하셨는데, 이들 둘은 자발적으로 주님께 온 이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과연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도 또 그들 자신들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그들이 '선생님, 어디 거하고 계십니까?' 라고 답하며 물었는데, 아마도 우선은 앞으로 따를 분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일 것 같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 '오고 있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볼 것이다(원어 참조)' 라고 답하셨는데, 우선은 올 것을, 그리고 오면 보게 될 것을 말씀하며 어쩌면 그들에게 선택권을 주신 것 같다. 이 두 제자들은 '가서 거하고 계신 곳을 보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그 날을 거했다 시각이 열 (시) 처럼 (쯤) 되어왔다 (39절)' 라고 기록한다. 당시 주님께서 거하셨던 곳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는데, 아마도 그 두 제자들은 주님께서 거하셨던 곳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주님께서는 부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거하셨던 곳이 화려한 곳은 아니었겠지만 아마도 매우 깨끗하고 정리가 잘 되었으며 그 둘을 유대인의 결례에 맞게 잘 대접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문자적으로 열시로 되어 있는데, 유대시각이면 오후 4시 정도, 그리고 로마시각이면 현재 시각과 같아서 오전 혹은 오후 10시 정도가 된다.

마태복음을 포함해서 소위 공관복음은 유대시각이 쓰인 것으로 보지만, 요한복음은 처음부터 헬라어로만 기록되어 코이네 헬라어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쓰여진 복음서이기 때문에 아마도 로마식 시간체계 즉 현대 시간으로 쓰여졌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 4장에는 주님께서 수가성 여인을 만났을 때가 여섯 시쯤 이라고 기록하는데, 유대시각으로는 정오가 된다. 문제는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는데 중간에 수가라고 하는 동네를 도착하는 시간은 이른 새벽에 떠나도 정오에 도착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따라서 아마도 문맥상 이는 오후 6시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들어갔었고, 고대에는 점심을 그리 챙겨먹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마찬가지로 두 제자들이 주님을 만나서 '그 날'을 함께 거했는데, 시각이 로마시각이었다면 오전 10시 혹은 오후 10시가 되는데, 앞에 '그 날'이라는 말이 있고 바로 뒤에 '바로 그 시각 ekeinen hora'는 말이 있어서 오전 10시로 볼 수 있다. 즉 주님을 만난 시각이 오전 10시쯤이며 그들은 '그 날'을 함께 보냈다.

40절은 그 두 제자 중 하나가 안드레이며 시몬 베드로의 형제였다고 하는데, 아마도 다른 하나는 사도 요한 자신이었을 것이다.  안드레는 41절에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서 주님을 메시야로 소개했다. 그런데 후에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사도 요한 셋이 주님과 특별히 함께 다닌 제자들이 되었다 (막 9:2, 13:3, 14:33 등). 물론 네명을 열거할 때는 안드레도 빠지지 않지만 후에는 안드레보다 베드로가 먼저 된다. 안드레가 베드로를 찾은 이유는 아마도 자기보다 나이 많은 형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눅 6:14) . 주님은 베드로를 보시고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다 너는 게바라 불려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전에는 성이 없어서 자신의 아버지 이름의 아들로 불렸었다. 따라서 지금처럼 소위 '가문'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었는데, 이는 왕족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보면 성씨라는 것이 현재 법적으로는 필요하지만 앞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면 사라질 것이다. 아무튼 시몬의 이름을 '게바'로 바꿔 부르시는데, 주님께서 바꿔 부르시는 것도 있지만 미래시제 수동태로 되어 있어서 '불려질 것이다'가 된다. 이 '게바'는 헬라어로 '페트로스' 이지만 그 뜻은 '돌'인데, 따라서 우리 말로 하면 '돌'이라고 불려질 것이라는 의미다.  이것은 독일 이름 중에 stein 즉 아인쉬타인 같이 '돌'이라는 말이 포함된 것이 많은 것과 같다.  랍비나 메시야 같이 다른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에 대해서는 '번역하면 metherméneuó' 이라고 하지만 베드로의 이름에 대해서는 '해석하면 herméneuó' 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herméneuó라는 말에서 hermeneutics 즉 성경해석학이라는 말이 파생되었다. 즉 다른 말은 그냥 그대로 번역하면 되는 말이지만 이 게바라는 말은 '베드로'라고 부르는 것 보다는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그 언어에 해당하는 '돌'로 번역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이 '페트로스'라는 이름은 음역해서 '베드로' 혹은 Peter 등의 고유명사가 되기 보다는 일본말 처럼 훈역이 필요한 이름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주님, 자신은 내려놓고 주님만을 증거하는 참된 주의 종의 모습을 침례자 요한을 통해서 봅니다. 주님의 사역이 이러한 헌신으로 인해 시작되었음을 또한 봅니다. 바위라는 특이한 이름으로 불리는 시몬 처럼 우리에게도 새롭게 주신 이름이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대대로 힘있는 가문, 양반가 혹은 명망있는 집안이라는 배경 보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이름을 더 사랑하기 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