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적 성전 정결, 껍데기만 남은 물질적 성전 신앙, 참 성전이신 그리스도 (요 2:13-25)
가나에서 첫째 표적을 보이신 후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는데, 거기에서는 많이 계시지 않았다. 그 이유에 대해 마 11:23과 눅 10:15에서 찾을 수 있을 듣 하다. 이제 13절은 '유대인들의 유월(절)이 가까이 (오고) 있었'음을 기록하고, 주님은 예루살렘 안으로 '올라'가셨다. 지도상으로 보면 가버나움은 오히려 올라가고, 예루살렘은 남쪽이라서 내려가야 하지만,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이기 때문에 항상 '올라간다'.
예루살렘에 가신 이유는 유월절을 위해서지만, 주님은 먼저 '성전 안에서 소들과 양들과 비둘기들을 팔고 있는 이들과 환전하는 이들이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셨다'. 여기 환전하는 이들이 '앉았다'라는 말은 마치 '좌정하다'라는 의미도 내포하는데, 이렇게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이들이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들을 그냥 보신 것이 아니라 '발견하셨'는데, 능동태로 되어 있어서 일부러 이러한 이들을 찾아가신 것이다.
그들에 대해 '끈들로 채찍을 만드셔서 양들과 소들 둘 다 성전 밖으로 몰아내시고 환전하는 이들의 동전들을 부어버리고 탁자들을 엎으셨'고 '비둘기들을 팔고 있는 이들에게 말씀하셨다 “이것들을 여기에서 가져가시오!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의 집을 만들고 있지 말라!”고 기록한다 (15-16절).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인데, 여기에도 소위 '기물파손'은 없었다. 단지 채찍으로 짐승들을 몰아 내시고, 동전들을 부어버리고 탁자들을 엎으셨지만 무엇 하나 부서진 것도 없었다. 특히 비둘기 파는 이들에게는 채찍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단지 말씀하셨는데, 채찍으로 치면 비둘기가 날아가서 손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현재 기독교 내에 개혁의 목소리는 많지만, 좌파식으로 폭력이나 비방이나 그외 불법적인 방법으로 하는 것은 주님께 속한 것이 아니다. 목적을 분명히 하고 방법도 강력하게 하되, 남에게 해를 입히거나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몸이 진정한 성전임을 말씀하시지만 당시 현존하던 헤롯 성전에 대해서도 그 권위를 인정하시는데, 아직은 주님께서 죽으시지 않으셨으며, 따라서 복음서 까지는 아직도 구약의 경륜을 따르는 때였기 때문이다. 당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출신에 따라 매우 멀고 먼 길을 걸어와야 했는데, 제단에 바칠 여러 짐승도 함께 끌고 오는 수고를 해야했다. 그 수고도 쉽지 않지만 도중에 제물로 드릴 짐승에 흠이 생기면 더이상 제물로 바칠 수 없었기 때문에 짐승들을 직접 몰고 오는 대신 돈을 가지고 와서 성전 가까이나 그 안에서 짐승을 사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문제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절기 동안 몰려 오기 때문에 그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었고 따라서 흠있는 짐승들도 거래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성전 내에서는 성전 밖의 돈이 통용되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성전 세켈만이 허용되었고, 이에 따라 환전하는 이들이 성행을 이뤘다. 이 모든 것이 '본질'은 잊혀지고 '비본질'만이 남게 했는데, 주님께서는 구약의 경륜을 통한 제사 모든 전반에 대해 부인하신 것이 아니라 (아직까지는, '다 이루'기 까지는) 점차 변질되어 이제는 제사가 아니라 흠 있는 것을 드리는 것에 더불어, 장사하는 것이 주가 되어 버린 것에 대해 심판하시며 정결케 하신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에는 배후를 봐주며 이익을 챙기던 세력자들이 있었을 것이다.
주님의 이러한 행동에 대해 유대인들은 “(당신이) 이것들을 하고 있는 것에 대해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소?” 라고 물었는데, 요한은 단지 '사람들' 혹은 '무리'라는 말 대신에 '유대인들'이라는 말을 쓰며 그들이 하나님을 따른다고는 하지만 정작 본질적인 열심은 없는 이들임을 폭로한다.
주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무시오. 그리고 세 날들 안에 내가 그것을 세울 것이오.” 라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물질적인 성전 안에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이 성전'은 헤롯 성전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0 그리고 6년을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세 날들 안에 세울 것이다?” 라고 물었다. 아마도 히브리어 혹은 아람어, 또 헬라어는 문장에서 의문문이 확실하지 않아서 단지 문장끝 억양을 올리면 의문문이 되는데, 따라서 이들도 '당신이 그것을 세 날들 안에 세울 것입니다' 라고 말할 때 이것은 글로만 읽으면 수긍하는 일반 문장이 될 수 있다. 그들은 주님의 말씀에 반문하지만 어쩌면 주님의 말씀을 따라하며 시인한 것이 되었을 수도 있다.
21절은 주님의 말씀이 사실은 '그의 몸의 성전'에 대한 것임을 말하는데, '성전된 그의 몸'이라고 번역하지만 원어에는 '그의 몸의 성전'으로 되어 있다. 즉 그의 몸이 성전이며 그의 몸에 성전이 있음을 말하는데, 주님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장막치신 분이셨고, 그 분 안에 신성과 인성이 공존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여기 '말씀하셨다'는 미완료로 되어 있어서 '말씀해 오셨다' 혹은 '종종 말씀하셨다'가 된다. 즉 자신의 몸이 성전이라는 말씀을 이때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도 해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22절도 '그래서 그가 죽은 자들 밖으로(부터) 세워졌을 때 그의 제자들은 이것을 말씀해 오신 것을 기억했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다'고 기록하는데, 제자들에게도 같은 것을 종종 말씀하셨다는 의미다.
성전을 '세우다'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의 '살아나다'는 같은 단어로 모두 '세우다' 혹은 '일어나다'를 의미한다. 물질적인 성전은 주후 70년에 모두 허물어지고 아직까지 1900년 이상 세워지지 않았다. 하지만 주의 몸이신 성전은 죽으신 후 사흘만에 다시 일어나셨다.
23절은 주님의 표적을 통해 많이들 그의 이름 안으로 믿었음을 기록한다. 그런데 24절 개역개정에 '의탁하지' 라고 번역된 말은 원어로 23절 '믿다 pisteuo'와 동일한 단어인데, 따라서 '믿음'이 무엇인지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구절이다. 믿음은 단지 '수긍'이나 '고백'이 아니라, 정말 '의탁'하고 '의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믿으신다면 '인정하심'이 되겠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지 하나님의 존재를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의미다. 많은 이들은 표적을 보고 주님 안으로 믿었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사람들에게 '믿지' 않으셨는데, 여기 시제 또한 미완료로 계속해서 그래 오셨음 즉 '믿어 오지' 않으셨음 혹은 맡기거나 의탁하지 않아 오셨음을 의미한다. 주님은 그 어느 권력이나 세력에 붙거나 부탁이나 청탁을 할 필요가 없으셨다. 사람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아셨기 때문이다 (25절).
주님, 육신적 혹은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종교놀이를 이제 그치고 참으로 영 안에서 또 진리 안에서 주님을 섬기게 하소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이 살아질 수 있도록 저희들 안에서 세우소서.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다른 것을 추구하거나 더러운 이익을 탐내는 이들을 심판하소서. 성전이신 주님 안으로 더욱 들어가고 더욱 믿기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