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부터 다시 태어남, 왕국의 시작 (요 3:1-8)

2장에서 건물로 지어진 물질적 성전이 참된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몸을 성전이라 말씀하셨던 주님은 이제 '그 영 안에서 (다시) 태어남'에 대해 말씀하신다. 물질적 성전 중심의 세계관에서 이제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관을 말씀하시는데, 이것은 철학적인 이해로도 매우 획기적인 세계관이다.  요한 복음에 의하면 주님께서 전하신 복음의 핵심이 여기 3장에 시작되고, 특히 그 개요와 핵심이 바로 '그 영', '다시 (혹은 위로부터) 태어남' 그리고 '그 하나님의 그 왕국'에 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꽤나 혐오하셨지만, 모든 바리새인들에 대해 그러셨던 것은 아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들의 관원이었으며 매우 철처한 원리주의인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밤에 비밀히 주님을 찾았는데, 그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매우 상세하며 친절하게 그리고 사랑이 가득하게 대답하신다. 주님은 바리새인들도 사랑하셨다. 그에게 오는 이들을 주님은 사랑하신다.

니고데모는 아마도 나이가 꽤 있는 사람으로 생각되는데, 그는 단 세 마디 말을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매우 길고 자세하게 답하신다. 주님의 이러한 모습은 주님께서 당신을 찾은 그를 매우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다. 니고데모는 처음에 단지 주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생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고백했지만, 그에 대한 답 보다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답하시는데, 다시 '아멘 아멘'으로 시작하신다. 그리고 '누구든지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그 하나님의 그 왕국을 보는 것이 가능하지 않소.' 라고 말씀하시는데, 개역개정의 '거듭나지'라고 번역한 것은 '다시 태어나다'라는 의미지만, '거듭'으로 번역한 말의 원어 anothen 은 '위로부터, 하늘로부터, 새롭게, 처음으로부터, 다시' 등을 의미한다. 이 동일한 단어가 마 27:51에서 성전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을 때 사용되었는데, ano가 그 어원이며 '위'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거듭남'의 문제는 단순히 새롭게 태어나는 것만을 말하지 않는데, 세상에서도 '마음을 다잡는다'는 의미로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말씀은 세상의 철학적인 관점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문제지만, 주님께서는 '영'에 대해 말씀하고 싶으셨는데, 니고데모는 '늙은 (사람)이면 어떻게 태어날 수 있습니까? 그의 어머니의 배 안으로 두번째 들어가서 태어날 수 없습니다 (없지 않습니까?)'라고 철학적인 관념 조차도 아닌 육적인 차원에서 질문을 한다. 부활을 믿는 바리새인으로서 이러한 유물론적인 질문을 니고데모는 하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다시 '아멘 아멘 내가 그대에게 말하고 있소. 누구든지 물과 영의 밖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 하나님의 그 왕국 안으로 (그는) 들어올 수 없소.'라고 답하신다. 3절에서 이미 '아멘 아멘'으로 말씀하셨지만 다시 5절에도 '아멘 아멘' 하시는데, 매우 강조하는 내용인 것을 알 수 있다. 3절에는 '위로부터 태어남'과 그에 따라 '하나님의 왕국을 보는' 문제를 말씀하셨다면, 5절에는 그 위로부터 태어남이 바로 '물과 영 (밖)으로'와 연결되며 이를 통해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물은 침례 즉 죄만 따르는 육신이 장사되는 것을 의미하고, 영은 영적인 태어남을 말하는데, 다시 말해 이것은 단지 마음이나 생각을 다잡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먼저 '위로부터' 나야하고 '영 (밖으로)' 나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6절은 '육신의 밖으로 태어나진 그것은 육신이오 그리고 그 영의 밖으로 태어나진 그것은 영이오.'라고 또 7절은 '내가 그대들에게 그대들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합니다 라고 말한 것을 (그대는) 놀라지 마시오.'라고 말씀한다.

니고데모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라며 묻는데, 그에 대해 주님께서는 '그 영은 뜻하는 곳에 불고 있소. 그리고 그의 그 소리를 (그대는) 듣고 있소. 그러나 어디로부터 (그것이) 와지는지 그리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대는) 알지 못하오. 그 영 밖으로 태어나진 모든 (이)가 그와 같소 (8절)'라고 답하신다. '바람'으로 번역한 말 pneuma는 '영'과 동일한 말인데, 뒤에 '불다'라는 동사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는 '영'이 아니라 '바람'으로 번역했지만, '영'으로 번역해도 어색하지 않다. 사도행전에서 바람처럼 불어서 임하신 성령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영은 보이지 않는 바람 같지만, 그 소리는 들을 수 있다는 즉 그 실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거듭난 이들에도 적용되는데, 거듭남의 실재는 분명 있지만, 그것이 사람들이 볼 수 있거나 알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단지 '영접 기도'를 했다고 확실히 구원 받은 증거가 아니다. 마음으로 믿고 또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되어지지만, 분명 공개적인 고백과 시인인 침례도 요구되며, 구원의 삶을 살아야 그 실재가 확인된다. 주님을 믿던 많은 이들이 후에는 주님을 떠나간 것을 볼 수 있다 (요 6:66).

주님,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체계적 혹은 시스템화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오직 그 영을 따르는 것이며 이는 실재임을 어렴풋이 봅니다. 주의 신비로운 구원하심이 오늘 주의 백성에게 임하시며 하나님의 왕국 안으로 부르시고 그 왕국을 이 땅에서 살 수 있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