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에 흘러 넘치는 하나님의 선물인 살아 있는 물을 주시는 주님. (요 4:1-14)
4장 1-2절은 문맥상 앞 3장에 포함되었어야 할 것 같다. 중요한 점은 앞서 주님께서 침례를 주셨다고 하지만 여기에서는 실상 직접 침례한 이들은 제자들이었음을 볼 수 있다. 이 때 제자들은 주님께서 택하셨고 사도라 칭하셨기 때문에 침례를 줄 수 있는 권위를 받았다고 이해할 수 있지만 이러한 권위 때문에 침례를 주는 것은 아니다. 행 9:18을 보면 단 한번만 등장하는 아나니아라는 제자에 의해 사울이 침례를 받는 장면이 있는데, 앞으로 주님께서 크게 쓰실 사울이 이렇게 매우 작은 형제에게 침례를 받았다. 침례는 무엇인가 거룩하게 하거나 복을 주거나 혹은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게하는 것이 아닌, 죽은 자 즉 옛 자아를 장사지내는 것이고, 따라서 땅을 파서 주검을 묻는 것이며, 이는 그 누구도 할 수 있는 것 처럼, 침례는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든 할 수 있는 것이다. 천국 안에서 우리는 침례자 요한보다 크다.
이제 3절은 주님께서 유대를 떠나셔서 다시 갈릴리 안으로 가셨다고 하는데, 4절은 '그런데 (예수는) 자신을 사마리아를 통해 지나가는 것을 해야 했다'라는 약간은 이상한 문장으로 되어 있다. 여기 '자신'이라는 말 auto는 주격이 아니라 대격 즉 (간접) 목적격으로 되어 있는데, '지나가다'는 또 능동태로 되어 있고, '해야 했다'는 강한 의지가 담긴 말이 있다. 지도를 보면 유대 땅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직선으로는 사마리아를 거치게 되어 있는데, 예전에 앗수르의 침략을 받아 피가 섞여서 혼열화된 사마리아를 유대인들은 이방 이하의 취급을 했기 때문에 가급적 직선이 아닌 돌아가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자신을' 즉 자신에 대해 이러한 여로를 택하셔서 사마리아를 통하셔야 했다.
그래서 5절은 수가라는 도시로 들어가셨는데, 그 곳은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에게 준 지방과 가까운' 장소였다고 기록한다. 즉 이 수가 마을은 성경의 종교적 유물이 아직 계속해서 살아 있는 지방이며, 따라서 구약의 많은 내용들이 비록 혼혈화 되었지만 그래도 영향을 끼치는 지역이었다. 주님께서는 긴 여로 끝에 피곤하셨는데, 바로 '야곱의 우물'에 앉아서 쉬셨고, 그 때 시각이 여섯(시) 쯤 이었다고 기록한다 (6절). 앞서 요한 복음은 시각에 대해 로마 시간을 따랐을 것이라 언급했는데, 그래서 이 때는 오후 6시가 된다. 주님께서 유대를 떠나 이 수가 마을 가까이 야곱의 우물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이 정도 시간은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유대 시각으로 해석하면 정오가 되어서 많은 설교자들이 보통 여인들이 우물에 와서 물긷는 시각이 아닌 한낮에 온 이유가 이 여인이 방탕한 과거를 가진 인물이었기 때문이라 설명하기도 하는데, 해석에 따라 이 여인이 방탕한 여자였는지 아니면 당시 우리가 이해하기 힘든 법에 따른 희생자 였는지 의견이 다를 수 있다.
이 유대 혹은 로마 시각에 대해 좀더 연구해 보면, 주님께서 새벽에 심문을 받고 얼마 안있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유대 시각 여섯 시 즉 정오부터 땅이 어둡게 되어 아홉시 즉 오후 세시까지 계속 되었다고 한다 (마 27:45 막 15:33 눅 23:44). 마태 마가 복음은 주님께서 유월절에 죽으셨다고 기록하지만 요한 복음은 19장 14절에 유월절 전날 여섯시에 빌라도가 주님을 심문했다고 기록하며 따라서 유월절 전날인 금요일에 죽으신 것으로 기록한다. 이러한 차이가 있는 것은 다시 말해 아마도 요한 복음은 로마 시각을 따랐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데, 마태 마가의 기록에 의하면 주님께서는 목요일에 죽으신 것이 된다. 이것은 구약에 의하면 하루가 저녁에 시작해서 그 다음날 오후까지인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마태 마가가 기록한 '새벽'에 심문을 받은 시각과 요 19:14의 '여섯시 (아침)'는 같은 시각일 것이고 따라서 요한복음의 시각은 현재와 같은 로마시각이 된다.
아무튼 주님께서는 이 여인이 오는 것을 보시고“나에게 마시게 주시오”라고 부탁한다. 거기에는 주님과 그 여인 밖에는 없었는데, '제자들은 음식을 사러 마을 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8절은 기록한다. 여기에서 '음식'은 간단한 식사를 의미하는데, 32, 34절의 제대로된 식사인 '양식'과는 다른 말이다. 여행 중에는 제대로된 '양식'을 먹기 쉽지 않다. 그래서 단지 시장기만 해결하는 '음식'을 구하러 제자들은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주님의 요구에 대해 사마리아 여자는“어떻게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나로부터 마시게 구하고 있습니까?”라고 묻는데,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게 상대해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한다 (9절). 이 말이 조금 흥미로운데, 주어가 유대인들이지만 '상대하다'가 중간/수동태로 되어 있어서 유대인들도 사마리아인들을 배척했지만 아마도 사마리안인들 역시 유대인들을 배격했을 것 같다. 항상 배척이나 배격은 양방형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대인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는데, 그들은 문화가 다르고 아마도 외모 역시 많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아마도 모두 아람어를 쓰고 있었기에 대화는 가능했다. 이렇게 당돌한 그녀의 반문에 주님께서는“만일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그리고 또 그대에게 '나에게 마시게 주시오' 라고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었다면 그대가 그에게 구했고 그가 그대에게 살아있는 물을 주었습니다.” 라고 답하시는데, '살아 있는 물'이 곧 하나님의 선물임을 말씀한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주시는 분은 지금 '말하는 이' 즉 주님을 의미한다. 주님은 하나님의 선물 즉 값없이 거저 주시는, 하지만 살아있는 물을 주시는 분이시다.
여자가 “주여, 당신은 (물) 길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물은 깊습니다. 그래서 어디로부터 살아있는 물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데, 이 '살아있는 물'이 우물에서 오는 것이라 착각했나보다. 그래서 그녀 나름대로 듣고 믿고 또 따른 야곱의 이야기 즉 '우리에게 우물을 준, 그리고 그도 그것 밖으로 마셨고 그의 아들들도 또 그의 가축들도 (마시게 한) 우리의 아버지 야곱'을 말하며 주님께서 그보다 크시진 않다고 단언한다. 이제까지 지켜온 뿌리있는 전통, 특히 계속해서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마시며 생명을 유지해 온 것을 들어 말하는데, 주님께서는 이에 대해 “이 물 밖으로 마시고 있는 모든 (이들)은 다시 갈할 것이오' 라고 답하신다. 이것은 물질적인 물을 마시면 육체적으로 다시 갈증이 생길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갈하다' 즉 목마르다는 말은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며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메마른 갈증을 겪는 인생을 가리킨다. 하지만 '누구든 내가 그에게 줄 물 밖으로 마시면 세대 안으로 결코 갈하지 않을 것이오. 그러나 그에게 내가 줄 그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 안으로 솟고 있는 물의 샘이 될 것이오'라고 말씀하시는데, 따라서 이 물은 물질적인 H2O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허무함과 갈증을 영원히 해결할 수 있는,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항상 힘차게 솟고 있는 그 어떤 무엇을 의미한다. 이것은 바로 성령이고 그 영이며 주님의 말씀이다.
주님,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도 아닌, 무시당하고 배척받던 사마리아 그것도 여인에게 일부러 찾아가셔서 가장 귀한 것을 베푸시는 주님을 봅니다. 주님 말씀하신 살아있는 그 물을 더욱 알게 하시고 길어 마셔서 그 넘치심을 알도록 인도하소서. 그 물은 살아 있어서 우리 안에서 영원히 샘솟는 생명이 됨을 우리가 체험하며 그 물을 우리 또한 값없이 주위에 넘쳐 흘러 보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