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란 무엇인가 (요 4:15-26)
요한은 1-3장에 걸쳐 주님이 누구시고 위에서 나는 것이 무엇인가 증거한 후 이제 구원받은 이들이 행해야 할 참된 예배에 대해 기록한다. 여자는 그 물이 무엇이지 잘 모르지만 단순히 자신의 편의를 위해서 '이 물을' 달라고 구한다. 이에 대해 주님께서는“가라 당신의 남편을 부르시오 그리고 여기로 오시오.”라고 응하신다. '이 물'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려주시기 위함인데, 그 여자는 "남편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라고 답한다.
이 여자는 자신에 대해 감추고 돌려 말했지만, 주님은 모든 것을 아시기에 그녀에게 잘 대답했다고 말하시며 사실은 그녀가 '남편들을 다섯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소유하고 있는 이는 당신 남편이 아닙니다 참으로 이것을 말했습니다.' 라고 답하신다. 그러자 그 여자는 이제 놀라며 '주여, 눈여겨 보니 당신은 대언자십니다' 라고 말하는데, 바로 이어지는 20절에는 바로 그녀가 정말 목말라 해온, 갈증을 느껴온 문제를 말한다. 남편들이 과거 다섯이나 있었고 현재는 남편도 아닌 사람과 살고 있는 그녀였는데, 그 이유가 그녀의 방탕이었던 혹은 당시 사마리아 지방에 행해졌던 여자에 대한 부당함의 결과였던 간에 그녀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삶을 살며 또한 주위에서 들어온 종교적 전통에 대해 회의를 품으며 항상 마음 속에 있던 질문을 주님께 꺼내어 놓는데, '우리 조상들은 이 산 위에서 절했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은 '예루살렘 안이 절하고 있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라고 한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부인이여, 나를 믿으라. 이 산 위에서도 아니고 예루살렘 안에서도 아닌 (곳에서) (당신들이) 아버지께 절할 시각이 오고 있습니다' 라고 답하신다. 사마리아인들의 전통도 더우기 유대인들의 전통인 예루살렘 성 특히 그 안의 성전도 아니라고 하신다. 그렇다면 요즘 소위 '교회' 혹은 '교회당' 또 '예배당'이라고 하는 건물은 더더욱 아니며, 이러한 건물을 '성전' 혹은 '성당'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은 이제 더 이상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데, 당시는 아직도 성전이 존재하고 성전 중심으로 모든 제사가 돌아가고 있던 때였지만 주님은 그것을 벌써 부인하신다. 우리 말 '예배' 혹은 '예배하다' 라고 번역된 말은 원어로 'proscuneo'인데, 몸을 앞으로 구부리다 혹은 엎드려 절하다 등을 의미한다. 이 말은 여러 곳에서 '경배' 혹은 '경배하다'로도 번역됐는데, 따라서 '예배'와 '경배'는 원래 같은 말이며, 그 어느 곳도 '제사'를 의미하지 않고 특별히 '모여서 종교적 의식을 갖는' 것은 결코 의미하지 않는다. 더우기 이것은 대부분 '함께'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주님께 혹은 하나님 아버지께 '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반대는 '우상숭배' 즉 우상 앞에 절하는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또한 22절에 '당신들은 알지 못한 것을 (것에) 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안 것을 절하고 있습니다. 이는 구원이 유대인들 밖으로부터 이기 때문입니다' 라고 말씀하시는데, 사마리아는 '전통'은 있지만 그 모든 것은 구전에 의하고 사람의 전통을 따르는 무지한 것이 되어 버렸던 것에 비해, 유대인들은 전통도 물론 따르지만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아직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구원은 이 말씀 없이는 불가능하다.
23-24절에 주님은 '예배' 혹은 '절하는' 것의 핵심에 대해 '그러나 시각이 와집니다 그리고 참된 경배자들 (절하는 사람들)이 영과 참 안에서 아버지께 절하고 있을 때가 지금 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는 그분께 절하고 있는 그런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영, 그 하나님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리고 그에게 절하고 있는 이들은 영과 참 안에서 절해야 합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절하는' 문제는 '몸'을 앞으로 숙이는 것이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영 안에서' 절해야 함을 말씀하시는데, '영'은 3장에도 언급됐지만, 볼 수도 없고 느끼기도 쉽지 않은 우리의 차원을 초월한 그 어떤 것이다. 그래서 소위 '예배' 즉 '주일예배'나 그외 다른 모든 '예배'를 포함하여 참된 예배는 어떤 절차를 따라서 우리 생각이나 감정 의지 등을 동원하여 주님 혹은 아버지 하나님과 만나려는 행위나 시도가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을 (우리의 혹은 그) 영 안에서 영적인 절을 하는 것임을 말씀한다.
그런데 이렇게 '영적'인 것만이라면 현실에서 어떻게 무엇을 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동시에 '참 안에서'도 요구되는데,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며 또한 동시에 우리 이웃을 사랑할 것 처럼, 영적인 면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나며 깊은 교제와 사귐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함께, '참 안에' 즉 이 '참'은 앞서 말했듯이 '실재, 현실, 현재'라는 의미로서 우리의 일상 생활을 가리킨다. 즉 보이지 않는 영적 실상과 더불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아버지께 절하는 삶, 즉 높이며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일상은 참된 '실재'를 반영하며, 이는 영적 실재 혹은 실체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설명은 모여서 소위 말하는 '예배'를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성경 여러 부분에서 '모이는' 것을 말하는데, 예를 들어 고전 14:26에는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즉 '모일 때'가 있음을 말한다. 하지만 이렇게 '모여서' 하는 것은 '예배' 혹은 과거 구약의 '제사'가 아니다. 참된 '절'은 우리의 삶 즉 일상에서 항상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설명하셨지만 여자는 '(나는) 그리스도라 말해지는 메시야가 오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가 오실때 우리에게 모든 것을 선포하실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데 (25절), 주님께서는 바로 '그대에게 말하고 있는 이가 나 이다'라고 답하신다. 여기에 '내가 바로 그이다' 혹은 '내가 그리스도다' 라고 되어 있지 않고 '나 이다'라고 하시는데, 이것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로서 요한 복음에 자주 등장하며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로서 과거 구약의 '여호와'와 동일한 말이다. 그 누구든 '나는 ~이다' 즉 예를 들어 '나는 학생이다' 등의 말을 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로서 이러한 문장은 매우 민감한 영적인 말이 되는데, 오직 하나님만 이렇게 '나는 이다'라고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다'의 시제가 현재진행형에 능동태로 되어 있는데, 그 누구도 참된 '지금'을 살고 있는 이가 없다. '지금' 혹은 '현재'라는 말은 인간에게 있어 잡을 수 없는 실재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영 안에'가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르는 참된 실재인 '참' 혹은 '현실' 혹은 '실재'가 따른다. 우리는 이렇게 아버지께 예배 혹은 절하고 있다.
주님, 에고 에이미 이신 주님을 만납니다. 모든 것을 초월하셔서 홀로 실재이신 거룩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주와 왕 되시고 우리의 절을 받으시며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 원합니다. 오늘도 주를 따르는 이들이 현실의 삶 속에서 그 일상을 통해 주께 절하며 순종하며 주를 높이는 하루 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