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침과 생명을 주시는 주님 (요 4:43-54)
40절에 이미 '이틀'을 기록했지만 43절에도 다시 기록하는데, 사마리아의 수가 마을 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서는 단지 이틀이면 족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주님께 마음을 여는가 혹은 아닌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원래 가려하셨던 갈릴리로 가시는데, '대언자가 자신의 고향 안에서는 존경을 소유하고 있지 않다'고 말씀하신다. 마 13:57은 주님께서 고향에 내려가셔서 배척을 받으신 것이 기록되었는데, 나사렛 역시 갈릴리의 일부이지만 그래서 나사렛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가셨고 명절 중에 주님의 모든 위대한 행하심을 목격한 갈릴리 사람들은 주님을 영접했다.
특히 전에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던 가나로 다시 오셨는데, 가나는 주님의 고향인 나사렛과 매우 근접한 곳임에도 거기에서는 배척을 당하지 않으셨다. 거기에서 어떤 왕의 신하 혹은 왕족을 만나시는데, 그의 아들이 조금은 멀리 떨어진 가버나움에 아픈 상태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47절에 의하면 그가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신다고 들어서 가버나움에서 주님을 뵈러 갔고, 오셔서 자기 아들을 고쳐 주시도록 구했다. 이 정도면 믿음이 있는 사람인데, 주님께서는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기 보다는 “표적들이나 기사들을 보지 않았다면 (당신들은) 전혀 믿지 않았다 (48절)” 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여기 '믿지 않다'는 2인칭 복수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을 책망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사람이 “주여, 제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 주십시오.” 라고 구하자 주님께서는 “가라. 네 아들이 살고 있다.” 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주님의 말씀을 믿고 갔다. 즉 이 사람은 믿음이 있는 사람이었다.
이튿날 가버나움으로 돌아 가는 길에 종들을 만나 그의 남자 아이가 살아났다고 들었고 그 시각을 묻자 그의 종들은 '어제 7시에 열이 그를 떠났습니다” 라고 답했는데, 그 시각은 로마 시각으로 (오후) 7시이며 따라서 이 아버지는 아마도 밤을 새워 집으로 걸어 돌아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 먼 거리를 걸으며 그는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 기도했을 것인데, '어제 7시'는 주님께서 “네 아들이 살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던 그 때 바로 그 시각이었음을 알았고 따라서 그는 주님을 믿었고 또한 그의 모든 가족도 믿었다. 이 사람은 원래 주님께 '내려와서 아들을 고쳐달라'고 부탁드렸지만 주님께서는 그냥 '가라'고 말씀하셨고 그는 그 말씀을 믿었던 것이다.
54절은 '그런데 이것은 예수께서 유대 밖으로 (로부터) 갈릴리 안으로 오셔서 하신 다시 두 번째 표적이었다'라고 기록하는데, 첫번째 표적은 가나의 결혼식에서 였고 (2:11), 이번이 두 번째인데, 역시 가나에서 보이신 표적이다. 주님께서는 시간상으로 이쯤해서 여러 이적들과 표적들을 이미 보이셨을 것이지만 요한은 공생애 시작 전에 행하셨던 포도주 사건을 첫번째 표적으로, 또 이제 이 왕의 신하의 아들을 고치신 것을 두번째 표적으로 기록한다. 이 '표적 sémeion'이라는 말은 단지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은 '기적'이라는 말 이상의 의미가 있는데, 기적은 일 자체를 가리키지만, 이 '표적'은 특정한 기적이 보이는 특별한 의미를 나타낸다. 즉 무언가를 대표하거나 증거하는 기적을 표적이라고 하는데, 주님의 첫째 표적이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으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말씀이신 주님께서 삶의 의미를 잃어 기쁨이 사라진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시는 즉 재창조 혹은 회복하시는 분이심을 증거했다면, 이제 두번째 표적은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즉 죽어가는 인생을 말씀으로 살리시며 고침과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나타낸다.
주님, 주님의 말씀이 단지 지식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고침과 생명과 능력 되시기 원합니다. 우리를 새롭게 하신 것도 놀라운 것인데, 우리 안에 생명으로 풍성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단지 주님의 '가라'시는 명을 따르면 족한 것을 봅니다. 주님께서 나사렛에서 표적을 보이시지 않고 가나에서 두번이나 보이신 이유를 묵상합니다. 내가 익숙한 곳, 나의 가족과 친지를 의지할 수 있는 곳을 떠나 주의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주님의 종들을 보내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