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 그 회복 사역 (요 5:10-18)
의사였던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각 병에 대해 병명을 확실히 기록하지만, 요한은 이 나은 자가 어떤 병에 걸렸었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다만 38년 동안 병약했었다고 기록하는데, 14절 주님의 말씀을 보면 그의 병약함은 죄 때문이었고, 38년 동안 병약했다면 아마 그의 나이가 꽤 되었을 것이다. 젊었을 때 지은 죄 때문에 그는 몸과 마음은 물론 정신까지 피폐해졌고 그 누웠던 깔개가 38년 동안이나 그의 보금자리가 되었었다. 주님은 그에게 그냥 일어나서 가라하지 않으시고 깔개를 들고 가라 하셨고 그는 순종했다.
아마도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문제가 되었던 것 같다. 10절은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 나은 자에게 말했었다. "안식(일)이오 그리고 깔개를 들은 것은 당신에게 허락하지 않소." (원어참조)' 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유대인들은 그 사람이 고침을 받던 당시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단지 깔개를 들고 가는 그를 보고 '그러면 안돼!'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을 따르는 그들의 입장으로는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나은 자는 "나를 건강하게 해주신 이 바로 그분이 나에게, '당신의 깔개를 들으시오 그리고 걸으라' 말하셨습니다." 라고 답한다. 물론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누가 그랬는가?' 라며 캐묻는다. 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매우 치명적인 문제였기 때문이다.
건강하게 된 사람은 주님께 순종은 했지만 주님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후에 주님께서 성전에서 그를 발견하시고 "보시오 당신이 건강하게 되었소. 더는 죄 짓지 마시오 그리하여 더 나쁜 어떤 것이 그대에게 되지 않도록." 이라고 말씀하신다. 생명의 삶 해설은 11절 '나를 건강하게 해주신 이 바로 그분이' 라는 문장이 창조 사역과 관계가 있다고 해석하는데, 여기 14절 '건강하게 되었다'는 말 역시 동일하다. 이 '건강하다' 혹은 '건강한'은 '온전함, (병이) 나음, 회복' 등을 의미하는데, '창조하다'가 히브리어로 '바라'이며 '만들다'는 '아싸'인데, '바라'는 1장 1절에만 적용된다. 그 후 3절 즉 첫째 날부터는 모두 '되었다 (헬, 기노마이)' 그리고 '만들다 (헬, 포이에오)'로 되어 있다. 즉 1장 1절만이 '창조' 사역이고 2절에 문제가 생겨서 그 후에는 모두 '회복' 사역이다 (https://hotaemin.com/translate/directgreek/69-z1 https://www.youtube.com/watch?v=XFDeaUEKoOU 참조).
마찬가지로 이 사람은 날 때는 온전하게 태어났지만 죄로 인해 병약하게 '되었고 ginomai' 이제 주님께서 다시 '회복케 hugie' '하셨다 poieo'. 즉 이것은 다만 죄로 인해 38년 동안 병으로 고생한 어떤 특정인에만 적용되는 말씀이 아니라, 타락한 인류는 물론 온 만물을 회복하시는 창조주로서 말씀이신 주님을 계시한다. 그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죄를 지으면 안되는데, 주님은 '더 나쁜 어떤 것이 그대에게 되지 않도록' 이라고 말씀한다. 한글 번역본들은 거의 모두 '생기지' 라고 번역했지만, 원어로는 모두 '되다 ginomai'로 되어 있다. '생기다'와 '되다'는 같은 말 같지만 '되다'라는 말씀은 다시 말해 창세기의 '회복'과 관계가 있다. 문제는 6일 '회복' 후에 '안식'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후에 타락했고, 결국 홍수로 멸망당했으며, 홍수 후에 조차 하나님을 대적해서 바벨탑을 쌓았고 결국 뿔뿔이 흩어졌다. 그래서 이 모든 것들이 '되었'는데, 이제 주님은 다시 회복시키신다.
유대인들은 이 안식의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핍박했는데, 안식을 지키라는 명령은 구약에서는 매우 엄중한 명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멈춤'을 의미하는 '샤밧'라는 단어는 정작 인류의 타락 후에 멈추지 않으시고 계속해서 일해오신 하나님께는 적용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쉬실 필요가 없고 이 안식은 인간을 위해 주셨지만 (막 2:27), 유대인들은 안식의 참된 의미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신다 나 또한 일하고 있다."라고 말씀하는데, 유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오히려 신성모독이 되어 주님을 죽이려 하게 된다.
18절 마지막 부분은 '자신을 하나님에게 동일하게 만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동일' 혹은 '동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 isos는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에서 '동등됨'으로도 사용되었다. 18절에는 주님께서 하나님과 동일하게 '만든다'고 하지만 빌 2:6에는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한다. 빌 2:6을 원어로 직역하면 '하나님의 모양 안에서 처음부터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에 동일하게 있기를 움켜잡기를 고려하지 않으셨다' 정도가 된다. 주님은 원래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 그리고 창조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동일하게 '있기를 (존재하다, '만들다'가 아니라)' 움켜잡는 것에 고려할 필요가 없으시다. 그 분은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18절 '동일하게 만들고 계시다'는 유대인들의 시각이다. 주님은 이미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하시다.
하지만 여기에 다시 고려해 볼 것은 요한이 '동일하게 만들고 계시는 것 처럼 보였기 때문이다'라고 하지 않고 정말 주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에게 동일하게 만들고 계'신다고 기록한 이유를 보아야 하는데,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하신 분 '이시'지만, 인성을 지니신 분이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하게 '만드시'는 것이 필요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바로 '성화'의 문제이며 이는 19절에 그 실마리가 있다.
주님, 우리 안에서 구속의 역사 즉 회복의 역사를 해 오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그리고 독생하신 하나님 그리고 창조주, 회복하시는 하나님으로 온전히 취하게 하소서. 말씀을 더욱 깊이 열어주시고 그 안에서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