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아들로 완전하신 인성을 가지신 주님께서 보이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우리도 따르게 하심 (요 5:19-29)

18절의 '동일하게 만들고'에서 '만들다'는 '이다'가 아니라 '되다'와 관계가 있다. 이미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시지만 인성 또한 소유하신 분으로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와 자신을 동일하게 만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동사의 시제는 과거나 완료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 더욱 그러한데, 이제 19절에 그 방법이 나온다. 계속해서 "아멘 아멘'이라 먼저 강조하시면서 '아들은 아버지 하고 계시는 것을 무엇이든 보지 못하면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할 수 없소. 그가 (아버지) 무엇을 하시든지 이것들을 아들도 똑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오' 라고 말씀하신다. 즉 소위 '성화'는 사람의 아들이신 주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현재 행하시는 것을 보고 똑같이 하신는 것 처럼, 우리 역시 동일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따라 하는 것이다.

20절은 '그 아버지는 그 아들을 사랑(phileo)하시기 때문이오. 그리고 그가 하고 계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고 계시오. 그리고 이 일들보다 큰 것들을 그에게 보여 주실 것이오 당신들이 놀라도록' 이라고 기록하는데, 여기의 '사랑하다'는 아가파오가 아니라 phileo 이며 이는 따뜻하고 포근한 감성이 넘치는 말이다. '아가파오'는 어쩌면 너무도 거룩한 말이지만 이 phileo는 감정이 듬뿍 단긴 말인데, 아버지가 그 자녀를 기쁨어린 눈으로 보는 그러한 사랑이다. 물론 모두 정관사가 붙어서 다만 육신의 아버지나 그의 자녀가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 아버지 그리고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아버지는 아들이신 주님에게 '이 일들 보다 큰 것들을' 이후에 보이시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놀란다. 주님께서 행하신 모든 기적들과 표적들은 당신 혼자서 행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행하신 것이 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21절에 '대개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키고 계시오 그리고 살리고 계시듯, 이처럼 아들도 그 뜻하는 이들을 살리고 있소' 라고 하는데, '일으키다'와 '살리다' 모두 현재진행형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육신적으로) 죽은 자들이 일으켜지지 않았고 다시 살아나지도 않았지만, 언제나 '현재'이신 하나님께는 그때 역시 부활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하심을 그 아들이신 주님도 역시 동일하게 행하시고 계시는데, 특히 이 '죽은' 이라는 말과 '살리다' 라는 말은 단지 육적인 면을 말하지 않고,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즉 살리고 계심을 말씀한다.

22-23절은 '대개 아버지는 결코 아무도 심판하고 계시지 않으시오 하지만 모든 심판을 아들에게 주셨소. 그럼으로 (그들이) 아버지를 공경하고 있는 것 처럼 모든 (이들)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기 위함이오. 아들을 공경하고 있지 않는 이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하고 있지 않소' 라고 기록하는데, 주님은 처음 오셨을 때 심판하지 않으셨지만 이제 두번째 오실 때는 세상을 심판하시는 심판자로 오실 것이다. 그 이유는 그 동안 사람들이 주님을 믿고 또한 공경하게 하기 위함이다. 아버지를 공경하고 또한 아들을 공경함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사람은 동시에 주님을 보내신 이 즉 아버지 하나님을 믿는 자인데,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씀한다 (24절). 영생은 죽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을 때 그 생명을 받으며 하나님에 대해 살아 있게 된다. 그래서 더 이상 심판이 없고 죽음으로부터 생명 안으로 오는 것이다.

25절은 '아멘 아멘 내가 그대들에게 말하고 있소. 그 시각이 오고 있소 그리고 죽은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지금이오. 그리고 그 음성을 들은 이들은 살 것이오' 라고 하는데, '그 시각'은 '오고 있고 (현재)', 죽은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미래형)' 때가 오지만 그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들은 (아오리스트)' 이들은 살 것이라 말씀하신다. 한 문장 안에 현재 미래 그리고 보통 과거를 의미하는 아오리스트까지 모두 쓰인 특이한 구절인데, 주님이 오신 시점부터 그 언제든 '지금'이라고 할 때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고, 믿음으로 받을 때 그 때가 바로 지금이다.

26-27절은 '대개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생명을 소유하고 계신 것 처럼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셔서, 자기 안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소. 그리고 그에게 권위를 주셔서 심판을 행하고 있소. 따라서 그는 사람의 아들이오' 라고 하는데, 28절은 바로 '이것을 놀라고 있지 말라'고 한다. 사람들이 놀라는 이유가 앞의 구절과 연관이 있는지 아니면 바로 따라 오는 '그 (시각) 안에서 무덤들 안에 있는 모두가 그의 음성을 들을 시각이 오고 있소 (28절) 그리고 선한 (것)을 한 이들은 생명의 부활 안으로, 악한 (것)을 한 이들은 심판의 부활 안으로 오게 될 것이오 (29절)'와 연관된 것인지 분명하진 않지만 앞뒤 모두가 놀랄만한 일이다. 바로 앞 25절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시지만 27절은 '따라서 그는 사람의 아들이오' 라고 하시고, 그 바로 다음에 '이것을 놀라고 있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본질적으로 또한 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그 말씀하시는 모든 약속은 주님의 인성 즉 사람의 어떠함에 대한 약속이다. 이것은 그래서 놀랄만한 일이다. '놀라다'는 '신기하게 생각하다' '기이히 여기다' 등의 의미도 있는데, 이러한 것을 신기하고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명령이시다. 보이지 않으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은 사람들을 심판하실 수도 있고 과거 구약에는 심판을 하셨지만, 이제는 '아들' 특히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위를 주셨고 심판을 행하게 하셨다. 따라서 이제는 사람의 아들인 주님의 음성을 듣는 이들이 부활 안으로 오게 될 것이다. '부활'은 문자적으로 '일어나다'를 의미하는데,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한다. 선한 (것)을 행한 자들이나 악한 (것)을 행한 자들 모두 일단은 한번 부활 즉 일으켜 지는데, 그들의 부활에는 큰 차이가 있다. 하나는 다시 살아서 하나님과 영원한 교제를 하기 위한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영원히 죽는 즉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져서 불못으로 던져지는 두번째 죽음을 위해서다.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과 더불어 주님의 이러한 언급은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마도 매우 놀랄만한 혹은 신기한 말씀이었을 것이다.

주님, 고운 밀가루와 같은 주님의 인성을 닮아가는 주의 제자들 되게 하소서. 주님 없이는 소망없는 우리임을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