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페를 소유함 (요 5:41-47)

원래 참된 영광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의미하는 것인데, 인간들 사이에도 영광이 있어서 서로들 취하려고 한다. 하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기에 '사람들로부터의 영광을 취하고 있지 않'으신다 (41절). 42절에는 주님께선 '그러나 나는 당신들을 알았소 곧 당신들 자신들 안에 하나님의 아가페를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알다'라는 말이 '인정하다'라는 의미도 되지만 여기에서는 '파악하다'를 말하는데,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가페가 없음을 파악하셨다. 나도 내 자신을 보면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음을 종종 깨닫고 한탄한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없기에 사람들 역시 사랑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 깨닫는 것은 이 '아가페' 사랑은 먼저 '행하는' 문제가 아니라 '소유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요 13:35에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는데, 헬라어로는 '너희들 안에 아가페를 소유하고 있으면' 으로 되어 있다. 사랑은 먼저 '행하기'에 앞서 '소유'의 문제다. 이 참된 사랑을 소유할 때 우리는 그로 인해 '행함'도 나온다.

43절은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왔소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취하고 있지 않소. 만일 다른 이가 그만의 이름 안에서 오면 (당신들은) 영접할 것이오' 라고 말씀하시는데, 많은 때 '이름 안에' 라는 구절이 기록된다. 예를 들어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 구하면' 이라는 구절은 원래 '내 이름 안에서 무엇이든 구하면'으로 되어 있다. 우리 말로는 이렇게 번역하기가 부자연스럽게 들리기 때문에 그냥 '이름으로' 라고 번역했지만, 원래는 '이름 안에'이다. 이러한 말은 단지 주님의 이름이나 아버지의 이름을 '가지고' 혹은 '사용하여'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성품 안에, 그 분의 뜻대로 라는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 안에서 오셨는데, 그 아버지의 이름이 단지 '야훼'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생명과 그 성품과 그 어떠하심 안에서 함께 임하셨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없었고 따라서 주님을 취하지 않았다. 사람들 안에서 하나님을 아가페 하는 것을 소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사람이 자신의 이름 안에서 오면 더 좋아한다. '신학'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님 당신 자체를 추구하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학파나 교파 혹은 인물의 이름을 따르고 결국은 분열이 따른다.

주님 당시에도 여러 종교적 분파가 있었고 그들 가운데 '서로 영광을 취하고 있'었다 (44절). 따라서 그들은 '믿을 수' 없었는데, 이 문장에서 목적격은 제외되었다. 즉 주님께서는 '누구' 혹은 '어떤 것'을 믿느냐 이전에 아예 그들 안에 믿음이 없었음을 폭로하신다. '유일신으로부터의 그 영광'은 사람들은 찾지 않았는데, 당장 현실에서 보이고 누리는 헛된 영광을 더 좋아했다. 특히 앞서 '다른 이름 안'이라는 것 중 구약에서 가장 큰 이름인 '모세'를 말씀하시는데, 오히려 그들이 '그 안에서 소망한' 모세가 그들을 고발하고 있음을 말씀한다 (45절). 모세의 율법에 따라 그들은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6절은 '만일 대개 당신들이 모세를 믿곤 했었더라면 나를 믿곤 했을 것이오. 그는 나에 대해 썼기 때문이오' 라고 말씀하시는데, 그들은 모세를 따른다고는 했지만 모세 또한 믿지 않았다. 그들의 행위로는 믿는다는 것을 전혀 증명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들의 연약함, 즉 율법과 육신의 연약함에 대해 솔직하지 못했다. 만약에 솔직했더라면 그들은 행위가 아니라 5장 전반부의 38년 되었던 병자에게 필요했던 은혜, 헤세드 혹은 카리스를 구했을 것이다. 구약은 주님을 증거하기 때문에 특히 모세의 '기록들을 믿지 않고 있으면' 주님의 레마의 말씀 또한 믿을 수 없다.

주님, 주님의 아가페를 소유한 이들이 함께 모여 주님의 어떠하심을 따르며 배우며 증거하게 하소서.